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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몰입…그의 연주는 명상이자 구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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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호 27면

1966년 제4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첼리스트들. 왼쪽부터 피아티고르스키, 한 사람 건너 카사도, 푸르니에, 샤프란, 로스트로포비치. 샤프란과 로스트로포비치는 콩쿠르에서 두 번이나 공동 우승한 라이벌이었다.

다닐 샤프란은 명성에 비하면 한국과는 아쉬운 인연밖에 갖지 못한 첼리스트였다. 그에게는 ‘첼로의 은자’ ‘음유시인’이란 호칭이 따른다. 요즘 유튜브에서 만나는 샤프란의 모습에서도 그런 인상을 여전히 받는다. 그는 비브라토를 활용해 소리를 탄력 있고 부드럽게 만드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사진에서 보면 왼손에 밴드를 붙이고 연주하기도 한다. 그만큼 힘들여 비브라토를 멈추지 않는다.

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첼로의 은자’ 다닐 샤프란

1980년대 초 어느 날 충무로 오디오 가게에서 일하는 Y씨가 나를 불러냈다. 그는 LP 석 장을 내 앞에 내놓았다. 다닐 샤프란이 단짝 긴즈버그와 연주한 베토벤 첼로 소나타집이었다. 내가 샤프란이란 이름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신품은 아니고 어느 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것 같은 멜로디아 판인데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몰래 들여온 외국음반이 거래되고 있었는데 그 가격보다 높았다. Y씨는 그 음반이 상당히 가치 있는 물건이란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 음반 임자는 아무래도 당신인 것 같아. S가 자기에게 달라고 여러 차례 전화했지만 제 주인에게 가져온 거요.” 물론 립서비스였다. S는 음악평론가로 이웃에 살고 있었는데 자기에게도 음반을 가져왔는데 가격이 터무니없어 그만뒀다고 말했다.

결국 그 음반은 내 차지가 되어 그날 저녁 과연 큰돈을 지불한 게 타당한 것인지 가슴 설레며 듣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다닐 샤프란이라는 첼리스트에게 매료되고 말았다. 그 다음부터는 샤프란의 전도사를 자처하고 다녔다. 음악정보가 귀하던 때라 그런 과잉 행위도 용납이 되었다. 얼마 뒤 방송국에 가봤는데 그곳에도 샤프란 자료가 없었다. 2년쯤 지난 뒤 다시 가봤더니 그제야 그의 음반을 비치하고 있었다. S가 방송에 나가면서 내게 샤프란 음반을 빌려달라고 해서 두어 번 빌려준 일도 있다. 연주 기법이 특이해서 아무래도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나는 지금도 샤프란의 대표작은 베토벤 소나타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 음반을 릴 테이프로 녹음해서 주변 몇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하나 같이 반응이 좋았다.

그 이후 다닐 샤프란의 인기는 말 그대로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러시아에서도 첼로의 은자로 알려진 인물인데 한국에서 갑자기 매니어가 폭증했다는 건 조금은 신기한 일이었다. 샤프란 동호그룹도 생겨나서 실제 그런 모임에 한번 가봤던 일도 있다. 그 인기를 타고 남대문의 어떤 분은 샤프란 불법 복사반을 여러 장 제작해서 샤프란 보급 사업(?)에 나섰다. 그분은 내게도 그 복사반을 보내고 전화까지 걸었다. 샤프란 전도사로 나의 기득권(?)을 인정한 셈이라고 해야할지.

샤프란은 동년배 로스트로포비치와 연주기법에서, 사회활동 등에서 아주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97년에 내가 모스크바에 갔을 때 로스트로포비치는 TV 청소년 프로에 나와 연주도 하고 청소년 오케스트라 지휘도 하곤 했는데 현지인들에게 물으니 샤프란이 지금 어디 있는지 자기네도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96년 5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다닐 샤프란의 첫 서울 연주회가 있었다. 나는 이 연주회에 큰 기대를 했다. 결과적으로 연주회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서울연주회가 되었다. 귀국 이듬해 그가 71세로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서울 연주회에서 그는 브람스의 ‘네 개의 엄숙한 노래’와 역시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D장조’, 벤저민 브리튼의 ‘첼로소나타 C장조’ 등을 들려줬는데 원숙한 풍모를 보여주긴 했지만 열기가 없고 알맹이가 빠진 듯한, 아주 조용한 연주회가 되고 말았다. 곡목 선택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네 개의 엄숙한 노래’는 죽음을 소재로 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있는 인간의 고별의 마음이 담긴 음악이다. 샤프란은 처음 만난 서울 청중에게 고별사를 들려준 셈이다. 이 연주회 카탈로그 해설과 연주 리뷰를 내가 썼는데 샤프란과의 인연이 끝까지 이어진 셈이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던 나는 샤프란의 연주에 크게 기대를 했다. CD가 발매된 것은 2002년. 이름이 알려진 데 비해 한참 늦은 셈이다. 개인 느낌이지만 그의 연주에서 평균 이상의 감흥은 얻지 못했다. 기대가 너무 커서일까. ‘답습파도 개혁파도 아닌, 자기류의 강한 비브라토를 유지하는 개성파’라고 어디에 썼던 일이 있다.

샤프란은 짧은 소품, 이를테면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같은 곡을 연주하는 데도 온 정신을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에게는 스크리아빈의 작품과 사상에서 드러나듯 음악을 명상과 구원의 큰 틀에서 조망하려는 페테르부르그의 한 조류가 깊이 배어 있다. 그가 들려준 명품 연주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몇 해 전에 나온 전집판에 수록된 카를 다비도프의 첼로협주곡 2번도 한 예가 될 것이다. 이 로맨틱한 곡에서 샤프란이 들려준 감미로운 아다지오는 오직 그만이 들려줄 수 있는 명품 연주였다.

마누엘 파야, 그라나도스, 알베니스 등 스페인 계열의 작품에도 그는 본바닥 출신의 카잘스 못지않은 설득력 있는 연주를 들려준다. 잠시도 긴장을 놓지 않는 그의 독특한 운궁법과 몰입의 자세가 이베리아 반도의 정서와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샤프란은 같은 시대의 누구보다 가장 러시아 정신에 투철한 연주가로 기억될 것이다.



송영 작가. 『선생과 황태자』 『부랑일기』(영문판) 등 작품집이 다수 있고 음악잡지, 신문 등에 음악칼럼을 써왔다. 『송영의 음악여행』, 『바흐를 좋아하세요?』 등 관련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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