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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 노이로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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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처음 들으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이 있다. 제왕절개가 그렇다. 수술에 의한 분만에 ‘제왕’이란 단어를 쓰게 된 이유에 대해선 설만 분분하다. 확실한 것 하나는 있다. 한국에서 이렇게 부르는 건 독일의 영향이다. 제왕절개는 독일어 카이저슈니트(Kaiserschnitt)의 직역이다. 신경증·강박 등을 뜻하는 노이로제(Neurose)는 독일어 발음 그대로다. 지금은 ‘스트레스’에 밀려났지만 과거 노이로제는 일상어처럼 쓰던 말이다. 파독 광부 얘기를 하지 않아도 독일은 이렇게 한국의 근대화와 깊숙이 연관돼 있다.

 미국식 모델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독일은 한동안 뒷전이었다. 그런 독일이 부활했다. 박근혜 당선인 때문이다. 인수위원회에선 중소기업 정책의 모델로 독일을 꼽는다. 독일 중견·중소기업, 다르긴 다르다. 유럽에서 대기업보다 중소기업 이익률이 높은 나라는 독일뿐이다. 숨겨진 시장에서 승자가 된 기업도 수두룩하다. 병원용 침대 다리에 부착하는 바퀴 시장을 꽉 잡고 있는 식이다. 독일에선 중소기업을 ‘미텔슈탄트(Mittelstand)’라고 부른다. 중산층이란 뜻도 있다. 중산층 복원을 공약한 대통령의 기업 정책 모델로는 딱 맞다.

 그런데 다른 면도 있다. 11년째 독일 가전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안규문 밀레 코리아 사장의 얘기다. “한국과 가장 큰 차이는 수십 년 이상 이어온 가족 경영이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 안정적이다. 처음 독일 회장을 만났을 때 1년이 아닌 10년 계획을 짜오라고 하더라. 고용 유지만 하면 기업 상속세는 0%에 가깝다.”

 큰일이다. 가족 경영, 상속세 면제는 한국식 경제 민주화에 반하는 용어 아닌가. 또 있다. 대부분의 독일 기업은 주주가 한정된 유한회사다. 주식회사처럼 회사 일을 외부에 공시할 의무가 덜하다. 게다가 독일은 고비용 체제다. 임금이 세계 최고 수준일 뿐 아니라 고용보험 등 회사가 부담해야 할 노동 비용이 거의 임금과 맞먹을 정도로 많다. 강한 중견기업은 독일의 유럽 재정위기 대응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최대 버팀목은 2002년부터 복지 개혁을 통해 재정 관리를 해온 점이다.

 트집 잡으려는 게 아니다. 배우려면 제대로 하자는 얘기다. 하기 좋은 말만 하고 부담과 희생에 대해 침묵하면 곤란하다.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기업 환경을 단번에 만들겠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노무현 정부의 스웨덴·네덜란드 모델이 공허했던 것도 그래서다.

 그리고 하나 더. 분만은 이왕이면 자연 분만이 좋다. 어렵다고 지원책을 쏟아내기에 앞서 스스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게 먼저다. 상태가 중하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건 당선인의 몫이다. 그렇더라도 수술은 전문가에게 맡기시라. 제왕이 직접 칼을 들고 절개에 나서서야 수술이 제대로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