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앙 시평] 제대로 된 도서관이 없다(김호동 서울대 교수·중앙아시아史)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내 손에 알라딘의 마술램프가 있다면 무엇을 해달라고 부탁할까. 하버드대의 와이드너 도서관을 번쩍 들어 한국 땅에 옮겨 주었으면…. 나는 터번을 두른 알라딘이 대리석으로 된 거대한 건물을 땅바닥에서 우지끈 뽑아내 하늘로 비상하면서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장면을 생각하며 혼자 기분 좋아했다.

이것은 오래 전 내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할 때쯤 가졌던 생각이다. 몇년 전 교환교수로 외국에 나가게 되었을 때 살인적인 생활비를 알면서도 굳이 다시 그곳을 선택하게 한 주범이 바로 그 도서관이었다.

타이타닉호와 함께 목숨을 잃은 아들 와이드너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모친이 2백만달러를 기증해 1915년에 세운 이 도서관은 오늘날 1백개 가까운 부속 도서관들(장서 1천4백만권)의 핵심이자 전 세계 대학도서관들 가운데서 최다의 장서를 자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이 2백만권으로 1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북미의 1백여개 대학 도서관과 비교해 볼 때 최하위권이다.

*** 美 와이드너館의 경쟁력

도서관의 생명은 어떤 책을 찾으려고 했을 때 거의 대부분 거기에 있으리라는 믿음을 줄 만한 장서량에 있다. 이런 점에서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도서관들은 하나같이 실망스럽다.

필요한 책이나 논문의 목록을 만든 뒤 검색을 해보면 그야말로 가물에 콩나듯 어쩌다 한두권씩 눈에 띌 정도니 어느 누가 이런 도서관을 믿고 찾아가겠는가.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연구자들은 각자 적지 않은 사재를 털어 자기가 종사하는 분야의 책이라도 사서 모아 개인 도서실을 차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로 볼 때는 극히 비경제적인 중복투자인 셈이다. 대형 공장에서 체계적으로 생산되는 시스템을 갖고 있는 외국 학자들에 대해 국내 연구자들이 가내 수공업 수준으로 맞서는 형국이다.

21세기 우리 문화의 토대가 될 지식산업은 다른 분야나 마찬가지로 인프라의 구축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그것은 우수한 인재의 양성과 연구여건의 개선에 달려 있다. 그런 면에서 믿고 신뢰할 만한 도서관의 설립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세계가 자랑하는 미국의 의회도서관이나 영국의 대영도서관이 지금으로서는 꿈같은 이야기지만, 우리 세대에 안되면 다음 세대, 그것도 안되면 백년 이백년 뒤에는 우리 후손들이 그런 도서관을 가질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는 장차 종이가 사라지고 디지털 정보가 모든 것을 대체하게 될 인터넷 시대에 구태의연하게 도서관을 가져서 무엇 하겠는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인쇄문화가 사멸할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설령 그런 시대가 온다고 축적된 지식의 저장고로서 도서관의 기능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식이 어떠한 매개체를 통해서 구현되든 그것을 체계적이고 완벽하게 갖춘 도서관은 고금을 막론하고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제한된 역량을 지닌 우리가 그러한 도서관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략적인 투자를 할 필요가 있다. 즉 투자는 분산되지 말고 집중돼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을 대표하게 될 도서관은 어느 기관이나 대학의 전유물이 아니고 결국 우리 국민 모두가 공유할 재산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전문화되고 특화된 도서관들을 육성해야 한다. 서로 비슷비슷한 책들을 사모으는 것은 재원이 제한된 우리에게는 현명치 못한 방법이다.

*** 전문분야별 집중 투자를

또한 해외 각지에서 수많은 언어로 쏟아져 나오는 지적 결과물들을 빠짐없이 포착해 수집하기 위해서는 전문 사서제의 도입이 시급하다. 우리는 국력의 진정한 기초가 정치나 경제 못지않게 문화의 힘에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 힘은 목청 높여 '대~한민국'을 외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믿을 만한 도서관 하나 제대로 세우려는 작은 노력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김호동(서울대 교수·중앙아시아史)

◇약력=1954년 청주 출생.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미 하버드대 박사. 서울대 인문대 교수. 중앙아시아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