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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민주共 총리 세 차례…서방과 대화 최적임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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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호 28면

"오랜 세월 유대인은 전 세계를 유랑했다. 대부분 유럽과 중동지역에 모여 살면서 적지 않게 혼혈이 이루어졌다. 동유럽 아시케나지는 민족이 아니라 유대교 신앙공동체다. 숫자는 매우 적지만 아시아계 유대인도 있다. 지중해계 세파라디 유대인 중 일부는 13세기께 인도 봄베이(현 뭄바이) 지역에 이주했다.
중국 송나라 때는 페르시아계 유대인 7가구가 실크로드를 거쳐 수도 카이펑(開封)에 흘러 들어와 중국 여인들과 결혼해 정착했다. 미국 유대단체의 조사에 의하면 지금도 이들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중국인이 있다고 한다. 문화혁명(1966∼76) 당시 권좌에서 밀려난 류사오치(劉少奇)가 중국유대인 후손이란 확인되지 않은 풍문이 한때 돌기도 했다.
흑인계 유대인도 있다.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혈통적으로 부모 중 한 명이 유대인이다. 다른 부류는 혈통적으론 유대인이 아니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흑인들이다. 미국에선 개종한 흑인유대인에게도 유대인 정체성을 부여한다. 흑인유대인 랍비도 있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아프리카 정치인 켕고와 돈도

가수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는 개종 유대인
프랭크 시내트라, 딘 마틴과 함께 60년대 3대 크루너(Crooner: 이지 리스닝 발라드 가수)로 불린 흑인가수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는 개종 유대인이다. 미국 흑인배우 야펫 코토(007 영화 ‘죽느냐 사느냐’에서 악당 카낭가 박사 역, TV 형사극 시리즈 ‘호머사이드’ 출연)는 특이한 경우다. 카메룬 경제수도 두알라 지역 족장이었던 아버지는 프랑스계 유대인들과 어울리면서 유대교에 입문했다. 아들 코토도 유대식으로 교육했다. 그래서 미국유대인들은 코토를 유대인으로 간주한다.
가수 레니 크래비츠, 작가 제임스 맥브라이드, 배우 소피 오코넨도, 레게 음악의 시조인 자메이카 태생 밥 말리 그리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 1기 비서실 차장을 지낸 모나 서트펜 등은 부모 중 한 명이 유대계 혈통이다. 비슷한 배경의 아프리카 정치인도 있다. 현 콩고민주공화국 상원의장 켕고 와 돈도(Kengo Wa Dondo사진)는 보기 드문 아프리카 유대인이다.
켕고는 1935년 콩고 적도지방 리벵게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레옹 루비치(Léon Lubicz)다. 의사인 아버지는 폴란드 유대인이고 어머니는 르완다 투치족 출신이다. 투치족은 르완다와 부룬디의 소수부족으로 여러 차례의 종족분쟁에서 많이 희생됐다. 당시 콩고·르완다·부룬디 세 나라는 벨기에령(領) ‘대 호수 국’(Pays du Grand Lac)으로 통합돼 있었다. 켕고는 지방서 중고교를 다닌 후 수도 킨샤사로 옮겨 킨샤사법과대학을 졸업했다. 62년 벨기에 브뤼셀 자유대학으로 유학 가서 해양법항공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65년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 법률특보, 킨샤사 고검장, 검찰총장, 주벨기에 대사 등을 지내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71년 모부투 대통령의 아프리카화(化) 정책에 따라 국명이 콩고에서 자이르로 바뀌자 그도 켕고 와 돈도로 개명했다. 82년 총리직에 올라 4년 재임 후 86년부터 외무장관을 지내다 88년 두 번째로 총리직에 임명됐다. 94년 세 번째로 총리직을 수행했다. 모두 9년 동안 총리 자리를 지켰다.
그가 세 번째 총리직을 맡은 시기는 모부투 일당독재에 저항하는 콩고 내 반군세력이 조직화되던 무렵이었다. 97년 반군이 모부투를 축출하고 로랑 카빌라를 대통령에 추대했다. 켕고는 정치인으로 변신해 적도지역 선거구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2007년 국가 권력서열 2위인 상원의장에 피선됐다. 그는 오랫동안 독재자 모부투의 측근 실세였지만 신(新)권력의 정치 보복을 피한 거의 유일한 구체제 인사였다. 켕고는 콩고 내 잡다한 부족에 속하지 않은 백인유대인 혼혈이므로 종족 간 대립에서 중립적 위치를 지킬 수 있었다. 또한 세계화와 자유경제체제의 옹호자인 그는 선진 서방국과의 대화 창구 역할을 맡길 수 있는 최적임자이기도 했다.

이스라엘, 에티오피아 ‘팔라샤’도 수용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세계 각지에서 핍박 받으면서 유랑하다 보니 유독 피붙이 의식이 강하다. 또한 그들만의 선민(選民)사상도 단단한 공동체 결속요인이다.
옛 소련 유대인의 이스라엘 정착은 역대 이스라엘 정부의 핵심 사업이었다. 이스라엘은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5년간 코드명 모세-여호수아-솔로몬 작전을 통해 에티오피아의 검은 유대인 ‘팔라샤(Falasha)’ 1만4000명을 ‘약속의 땅’으로 공수했다. 팔라샤의 유대인 정체성에 대한 역사적 고증은 없고 다만 몇 가지 전설만 존재할 뿐인데도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일부 유대인이 아비시니아(현 에티오피아)로 이주해 정착한 후손이라는 설이다. 또한 솔로몬과 시바 여왕 사이서 태어난 아들 메넬릭이 어머니 나라인 에티오피아로 돌아올 때 데리고 온 유대인 무사 몇 명이 현지 여성과 결혼해 낳은 후손이 팔라샤의 선조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랍비는 팔라샤의 유대인 정체성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이 사업에 반대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정보기관 모사드의 주도로 미 중앙정보국(CIA)과 수단 정부의 도움을 받아 팔라샤의 송환을 관철시켰다.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정체성이 희미한 검은 유대인 팔라샤도 피붙이로 인정해 세 차례에 걸친 국제공조 공수작전으로 이들을 모두 이스라엘로 데려와 세계 유대인의 결속을 과시했다.
여기서 유대인에게 한 가지 배울 점이 있다. 우리는 대체로 선진국에서 잘나가는 동포에게만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반면 중국, 중앙아시아 그리고 기타 어려운 지역 출신 동포에 대해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체류 규정·절차 등을 앞세워 차별대우를 한다. 범죄 예방과 노동시장 잠식이 그 이유라지만 이들만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닐 뿐더러 또한 이들이 하는 험한 일은 대부분 우리 노동자가 기피하는 업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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