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저소득층 병원비 깎아 지역구 사업 늘리다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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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해를 넘겨 가까스로 통과된 올해 예산안의 부실 심의 폐해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막판에 여기저기에 유력 국회의원들의 지역구 선심 예산을 끼워넣으면서 정작 정부 지출이 꼭 필요한 국방예산과 극빈층의 복지예산이 뭉텅이로 잘려나간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빈곤층에 대한 의료비 보조(의료급여 경상보조) 예산이다. 최저생활을 하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아파서 병원에 가면 의료급여 환자로 분류돼 일반 의료보험 환자와는 달리 진료비를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전액 부담한다. 이 진료비를 대주기 위해 책정된 예산이 의료급여 경상보조 예산이다. 그런데 국회가 올해 예산안을 막판에 졸속으로 처리하면서 당초 책정된 정부안(중앙정부 5000억원, 지자체 1400억원) 가운데 2842억원을 삭감해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주요 국회의원들의 지역구 공약사업 예산은 1000억원 가까이 늘렸다. 대선과 총선 과정에서 서민생활 안정과 저소득층 보호를 외치던 의원들이 막상 예산 심의에서는 지역구 표심을 챙기느라 우리 사회에서 가장 절실한 도움이 필요한 최하위 계층의 의료비를 깎은 것이다.

 의료급여 환자들이 당장 진료를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부족하나마 올해 편성된 예산으로 병원비를 충당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예산이 바닥나는 하반기 이후다. 그동안 저소득층에 의료비 지원 예산이 부족해 매년 연말이 가까워 오면 외상으로 처리했다가 다음 해에 보전해 주는 편법을 써 왔다. 그러다 보니 일선 병원에서는 하반기 이후엔 아무래도 이런 ‘외상’ 환자들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가난의 고통에다 ‘진료 거부’의 설움까지 안기는 꼴이다. 바로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올해 예산을 늘려 잡았는데 국회가 이를 매몰차게 외면한 것이다.

 이미 예산안이 확정된 만큼 당장은 되돌릴 길이 없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국회의원들이 예산을 얼마나 부실하고 졸속으로 심의했는지 기억하기 바란다. 저소득층의 병원비를 빼앗아 지역구 토목사업에 돌린 의원이 누구인지를 가슴에 새겨두길 바란다. 그리고 다음 선거에서 반드시 표로 심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