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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하려면 육필 지원서 써야하는 회사, 왜?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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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박종원 코리안리 사장

코리안리 같은 재보험회사는 인재 육성 관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전 직원을 영국의 보험대학, 해외 대형 재보험사 등에 연수 보냅니다. 구성원의 5%는 늘 연수차 해외에 체류 중이죠. 국내 금융회사 중 해외영업 실적 비중이 20%에 이르는 곳은 코리안리밖에 없을 겁니다. 웬만한 회사들은 3%가 채 안 될 겁니다. 금융사의 해외 실적은 제조업체의 수출에 해당하죠. 해외영업은 우리 보험시장의 파이를 키우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렇듯 기업의 가장 중요한 자원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사람 뽑는 일을 소홀히 하는 건 아이러니입니다. 일례로 서류전형 같은 신입사원 채용 과정의 일부를 외부에 맡기는 건 문제가 있어요. 입사원서를 인터넷으로 받는 것도 그래요. 한꺼번에 수십 군데 지원을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성의 있는 지원서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저희는 입사지원자가 회사를 찾아와 접수해야 합니다. 평생 다닐 수도 있는 직장인데 지원 결심을 하기 전에 한 번쯤 일터를 둘러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해외 실적 비중 20%, 전 직원 해외연수
인력 충원 과정엔 코리안리의 기업문화가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우선 입사원서를 육필(肉筆)로 써야 합니다. 작성하는 데 꼬박 이틀쯤 걸린다고 합니다. 지원자의 내면세계를 살펴보려 성공은 물론 실패 경험까지 적게 하죠. 악필이라도 정성껏 쓴 흔적이 엿보이면 후한 점수를 줍니다. 필체를 보면 지원자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죠.

또 원서 접수, 서류전형, 야외면접에 회사 구성원들을 참여시킵니다. 야외면접은 하루가 걸리는데 오전엔 서울 강남의 청계산을 오르게 합니다. 이때 지원자를 6명씩 묶어 조를 짜고 한 조에 2명의 직원을 배치합니다. 이들이 등산 도중 지원자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됨됨이를 평가하고 체력도 살펴보죠. 오후엔 달리기·축구 등을 합니다. 축구 잘하는 것보다 공을 열심히 쫓아다니는지를 봅니다. 소극적으로 주변을 겉도는 사람은 감점 대상이고요. 코리안리의 인재상은 체(體)·덕(德)·지(智)를 겸비한 야성 있는 사람입니다. 야성이란 환경에 적응해 살아남는 생존본능 같은 겁니다. 코리안리 구성원의 DNA라고 할 수 있죠. 찰스 다윈의 말대로 가장 우수한 종(種)은 힘이 센 종이 아니라 환경에 잘 적응하는 종이죠. 기업 환경은 비즈니스가 이뤄지는 생태계입니다.

이른바 스펙은 서류전형 단계에서만 봅니다. 서류전형을 통과하고 나면 그 사람의 내면을 봅니다. 인생관이 반듯한지, 겸손하고 인내와 배려를 할 줄 아는지 보는 거죠. 면접 도중 답변을 제대로 못했다고 떨어뜨리진 않습니다. 면접관의 질문에 운이 작용하기 때문이죠. 면접관으로는 저와 3년차 남녀 대표를 포함해 7명이 들어갑니다. 여기서 투명하게 합의를 해 최종합격자를 결정합니다. 신입사원들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입사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낍니다. 채용 과정에 참여한 직원들은 “이번에 이토록 탁월한 후배들이 들어왔구나” 하면서 스스로 자극을 받습니다. 그래서 일도 일이지만 자기계발에 더 열중하게 되죠. 자신이 뽑은 후배들이니 애정도 각별합니다. 자연스레 직장과 인생의 멘토가 됩니다.

외환위기 발발 직후인 1998년 코리안리에 부임해 보니 보증채권이 많아 회사가 파산 지경이었습니다. 극적 반전 없이는 영업정지를 당해 퇴출될 운명이었죠. 저는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선택은 하나뿐입니다. 고통과 희생을 감내하고 앞으로 전진할 건지, 아니면 그대로 서 있다 최후를 맞을 건지 결정해야 합니다.” 3월 결산법인이라 부임 후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8개월이었습니다.

수익을 단기간에 늘릴 수 없어 인력을 줄이는 구조조정을 했습니다. 가분수꼴인 조직을 효율적인 피라미드형 구조로 만들려면 상급자들부터 내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임원을 포함해 차·과장급 이상의 50%를 내보냈습니다. 전체 임직원의 30%가량 됐죠. 이 중에 노조위원장도 있었습니다. 당시 부장으로, 정권 실세의 초등·중학교 동기도 포함됐죠. 이렇게 센 사람들을 내보낼 수 있었던 건 원칙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대상자는 근무성적 평가와 다면평가를 기준으로 선정했습니다. 노조위원장을 내보내려 하자 당시 노사정위원장이 전화를 걸어와 “노조 탄압이라는 이야기들을 하던데”라고 하더군요. “구조조정 대상은 실적과 평판을 토대로 객관적으로 정한다. 그 사람이 나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나갈 수밖에 없다”고 응수했죠.

경비 절감을 위한 구조조정이지만 사내에 경쟁이라는 요소가 도입됐다는 더 큰 부수효과를 얻었습니다. 기업문화에 일대 혁신이 일어난 거죠. 과거엔 3년마다 사장이 바뀌다 보니 구성원들이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이 심했습니다. 해바라기처럼 사장만 바라봤죠. 사내에 적절한 경쟁이 이뤄지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회사와 경쟁이 되겠습니까. 국내 재보험시장에도 외국계 재보험사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신바람 일터 되려면 소통이 가장 중요
구조조정은 대자연에서도 일어납니다. 일례로 나무도 구조조정을 합니다. 언젠가 과일나무를 사러 갔더니 주인이 잘 자란 가지의 일부를 잘라 냅디다. 이식을 하면 자양분 공급이 제대로 안 돼 이렇게 가지를 쳐 줘야 열매를 잘 맺는다는 겁니다. 기업도 부실해지면 가지를 쳐 사내 자원이 분산되는 걸 막을 필요가 있습니다.

입사원서에 실패 경험을 적게 하듯이 부서별로 실패사례 발표대회도 합니다. 실패를 자산화하자는 취지죠. 실패해 본 사람은 그 원인을 깨닫고 같은 우를 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패의 원인을 가장 생생하게 드러낸 부서에 최고상을 줍니다. 실패를 성공의 어머니로 삼으려면 실패 원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공유해야 합니다. 보고된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는 건 물론이죠.

직장생활은 모름지기 신명이 나야 합니다. 출근할 때면 신바람이 나야 합니다. 웬만한 직장인들은 집에 있는 시간보다 회사에 나와 일하는 시간이 더 깁니다. 신바람 나는 일터의 필수조건은 소통입니다. 소통의 조건은 눈높이에서 이뤄지는 대화이고요. 대등하지 않은 관계에서는 대화는 돼도 소통이 잘되지 않습니다. 가령 최고경영자(CEO)가 직원들과 식사하면서 마음을 열고 회사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비전도 보여 준다면 그건 소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 늘어놓고 이런저런 지시만 하면 소통이 아닙니다.

저는 경제관료 출신으로 코리안리에 부임할 때만 해도 ‘낙하산 CEO’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장수 전문경영인 소리를 듣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 말 그대로 전문경영인이 얼마나 있는지 미지수입니다. 전문경영인이라면 자신의 철학과 스토리가 있어야 합니다. 철학도 줏대도 없이 이 눈치 저 눈치 본다면 집행임원에 불과하다고 하겠죠. CEO는 업종을 불문하고 자신이 책임진 회사에 목숨을 걸 각오를 해야 합니다. 연임 욕심, 좋은 실적을 올려 더 나은 자리로 옮기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여기가 내 뼈를 묻을 곳이라는 생각으로 정면 돌파해야 합니다. CEO가 눈치 보지 않고 회사 일에 매진한다면 당장 어렵더라도 회생할 기업이 굉장히 많아질 겁니다.

기획·정리=이필재 포브스코리아·이코노미스트 경영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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