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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박근혜 정부의 ‘북한 다루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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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강영진
논설위원

이번 대선 기간 북한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논평과 기자회견, 성명, 언론 기고문을 내놓았다. 대선 이슈로 불거진 서해북방한계선(NLL) 논란은 물론 박근혜 당선인의 외교안보통일 공약과 유신 부활 논쟁 등이 주 대상이었다. 우리 대선 무대에서 북한이 나름의 ‘선거운동’을 벌인 셈이다.

 매번 선거 때마다 벌어지는 북한의 ‘선거운동’이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기에 국내 언론들은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엔 좀 특이한 사례가 있었다. 바로 지난 1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이하 조평통) 서기국이 박근혜 후보를 상대로 낸 ‘공개질문장’이다. 참고로 조평통 명의로 나오는 문건은 노동신문 등에 실리는 각종 논평과 달리 남북관계 현안에 대한 북한 당국의 공식 입장을 알리기 위한 목적을 갖는 것이 보통이다.

 박근혜 후보가 외교안보통일 분야 정책 공약을 발표한 것은 지난달 5일이었다. ‘3대 기조, 7대 정책과제’로 제시된 공약에 대해 북한은 3일 만에 ‘조평통 대변인 기자문답’ 형식으로 “전면대결공약, 전쟁공약”이라고 비난했다. 그랬던 북한이 20여 일 뒤에 박근혜 후보를 상대로 새삼 ‘대북정책 기본 입장’을 질문한 것이다.

 ‘공개질문장’의 내용은 북한이 늘 주장하는 것들이어서 크게 주목할 대목은 없다. 다만 형식과 시점은 상당히 계산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 역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대북정책의 전환을 촉구한 것이다. 선거 결과가 나온 뒤에 할 법한 일을 앞당겨 실행한 셈이다. 선거철에 북한이 이런 식의 태도를 보인 것은 처음일 것이다. 이 점은 박근혜 당선인의 새 정부에 대해 북한이 새롭게 관계 설정을 모색할 것임을 시사한다.

 2008년 초 막 출범한 이명박 대통령 정부에 대해 북한은 일찌감치 기대를 접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뒤 한 달여 동안 북한은 이 대통령에 대해 한 번도 발언한 적이 없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보수적인 한나라당 정부로 바뀌었지만 대북 정책이 어떻게 바뀔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던 것이 2008년 3월 26일 당시 김태영 합참의장 내정자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북한 핵무기에 대한 선제타격 가능성을 언급한 것을 계기로 급변했다. 북한은 4월 1일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대통령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 남북한 교섭이 진행될 때를 제외하면 그칠 때가 없었으며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북한이 박근혜 당선인을 상대로 대선 투표일에 앞서 공개질문장을 내놓은 것은 이명박 대통령 정부와 맺은 악연(惡緣)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의도를 내비친 것이라고 기자는 추정한다. 공개질문장에 담긴 질문들이 모두 ‘우리를 자극하지 말라’는 뜻을 에둘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추정이 맞는다면 북한은 앞으로 상당 기간 박근혜 당선인 내지는 대통령을 상대로 한 발언을 자제할 것이다. 물론 2008년의 ‘핵무기 선제타격’ 발언과 같은 돌발사건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북한이 격하게 반응하는 사안들이 대부분 우리로선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유사시 군사작전을 총괄 책임져야 하는 합참의장 내정자가 의원들의 가상 상황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무심코 나온 ‘핵무기 선제타격’ 발언이 남북관계에 결정적 타격을 가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굳이 북한 입장을 이해해 보자면 ‘안 그래도 보수정권이 들어서서 울고 싶은데 선제타격 발언이 뺨을 때린 격’이라고나 해야 할까.

 박근혜 당선인의 대북정책 공약 가운데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통해 남북관계를 정상화’한다는 내용이 있다. 남북한이 정치·군사, 사회·경제의 다방면에서 신뢰와 협력을 쌓음으로써 갈등을 해결하고 실질적 평화를 구축한다는 중장기 정책이다. 그런 신뢰 프로세스의 첫 단추를 끼우는 것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님을 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는 긴 여정이 순탄하게 자리잡기 위해 ‘박근혜 정부’가 고려해야 할 일은 무수히 많다. 북한의 비위를 맞출 필요까진 없지만 의도하지 않게 판이 깨지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