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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2017년 겨울, 대한민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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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지난 두어 달, 표심을 그냥 표류하도록 두었던 것은 나의 선호가 소멸된 때문이 아니다. 논리를 무장해제한 상태에서 후보들의 매력 포인트가 얼마나 나를 감전시키는지를 두고 보고 싶었다. 매혹의 서신을 받기라도 하면 발신항(港)을 찾아 달려가 구애의 답장을 전해주리라고 마음을 다지기도 했다. 그런 서신은 없었다. 민주화 25년, 짧은 희망과 긴 절망, 철없는 환호와 쓰라린 배신의 교차를 다섯 번이나 경험한 지금 ‘정 주고 내가 우네’를 또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나 이 방법론적인 표류를 마감해야 하는 오늘, 정 주고 내가 울까 두려운 내일의 결단을 위해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2017년 겨울, 대한민국.

 내일 자정이면 청와대행이 확정될 당선자가 국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낼 것이다. 5년 뒤 겨울, 그것은 부도난 기업의 어음처럼 나뒹굴고 있을까, 한국의 미래는 정권 교체에 달려있다는 그 새삼스러운 외침에 또다시 귀가 솔깃해질까, 실세들이 소멸된 텅 빈 공간에 대통령 홀로 서 있지 않을까, 아니면 집단 난투극에 기진맥진한 한국이 어느 몰락의 골짜기에서 가쁜 숨을 쉬고 있지는 않을까. 민주화 25년, 어떤 정권도 이런 우려를 완전히 피해가지 못했기에 이런 근심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양극화와 기회 격차를 원만히 관리하면서 우리의 열정과 잠재력을 한껏 뿜어냈다면 일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는 진작 넘었을 한국을 아직 ‘복지와 경제민주화’라는 뒤늦은 쟁점 속으로 몰아넣은 주범은 후진정치다. 자기 진영의 우월성과 정당성을 한 치의 양보 없이 고집해온 정치행태가 원흉임에도 한국 정치는 대오각성은커녕 부정(否定)과 전가의 논리로 연명해 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시민사회가 희망적 진화를 거듭하는 동안 정치는 고립된 변이 과정을 밟아왔기 때문이다.

 향후 5년, 필자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한풀이, 독주, 그리고 극단이다. 필자는 ‘착한 사람’ 문재인의 배경에 숨은 친노그룹이 기다렸다는 듯 재출현해서 못다 한 고인(故人)의 꿈에 과격한 재시동을 걸 것을 경계한다. 세금폭탄을 탑재한 폭격기를 재발진시키고 기업, 대학, 매스컴, 승자를 ‘공공의 적’으로 호명하는 악몽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정의로운 말도 싸가지 없이 하면 향기를 잃는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싶지 않다. 원하는 것 원 없이 해준다는 아름다운 거짓을 경계한다. 진보는 지혜로운 포용이거늘 ‘한풀이 정치’ ‘씻김굿의 원한정치’가 착한 사람을 통해 뿜어져 나올 것을 경계한다.

 ‘모성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MB정권에서 구박받아온 친박그룹이 ‘인자한 모성’ 박근혜 뒤에 숨어 한껏 부풀어 오른 허기증을 달랠 것을 경계한다. 대갓집 문간방에서 5년 더부살이한 그 한을 보상받고 싶은 과욕이 ‘여성대통령’을 둘러싼 견고한 경비세력의 암구호로 변질될 것을 우려한다. 진취적 의미를 담은 시민사회발(發) 개혁 요구가 국가질서와 원칙을 강조하는 소신정치의 벽에 부딪혀 시든 꽃잎처럼 떨어질 것을 경계한다. 공생을 위한 대통합 정치가 힘센 자와 가진 자의 총화정치로 화할 위험을 꼬집는 충언이 배달사고로 종종 실종될 것을 경계한다.

 양자는 모두 ‘극단의 정치’라는 지극히 위험한 요소를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이다. 그것은 한국정치의 고립적 진화과정이 배태한 불운의 운명임을 우리는 아프게 체험했다. 그 운명적 쳇바퀴에 또다시 걸려들지 않으려면 내일 태어날 정권이 오늘 반드시 약속해야 할 것이 있다. 포용정치, 연립정권이다. 이 신선한 돌파구가 한국정치사에서 한 번도 시도되지 않은 이유는 여럿이다. 동종교배로 번식해온 정치생태계의 나쁜 습성, 5년 단임이라는 짧은 집권기간, 논공행상 잔치에 부족한 공직수, 그리고 권력집단의 응집력이 약화될 위험. 문재인 후보가 내건 거국내각에 새누리당 정치인이 참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과거 민주당과 자민당을 합류시킨 박근혜 후보는 연립정권의 1단계를 성사시킨 것으로 봐도 좋으나 복지부, 노동부, 여성부에 야권 세력을 기용한다면 진정한 대통합 정치에 훨씬 다가갈 것이다.

 이제 표류했던 표심에 닻을 내릴 때가 되었다. 정 주고 내가 울지 않으려는 방법론적 표류였다. 어차피 시대의 패러다임을 한꺼번에 업그레이드할 카리스마는 없으므로 ‘극단의 위험’을 줄이려는 후보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기대를 현실화했기 때문이다. 2017년 겨울, 앞에서 떠올린 암울한 장면을 조금이나마 걷어줄 후보, 국가재정을 파탄내지 않을 후보, 세계경제의 난기류에도 생활정치·서민정치에 몸 바칠 각오가 된 후보, 한 줌의 친북세력에 흔들리지 않을 후보에게 작은 한 표를 보태볼까 하는 것이다. 한 가지 전제가 있다. 내일, 당선자가 결정되면 그가 누구라도 응원과 격려의 마음을 보내야 한다는 유권자의 성숙한 마음가짐이다. 그나마 2012년 대선정국에서 유권자들은 포용과 통합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