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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으로] 한국 맥주 왜 맛이 없나 (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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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국산 맥주는 하이트진로와 오비맥주 등 양대 기업이 만드는 아메리칸 라거 스타일 일색이다. 소규모 맥주 시장은 설비·유통 관련 규제에 묶여 있어 한국 맥주의 다양화가 어려운 실정이다. 이런 틈새를 비집고 다양한 종류의 수입 맥주가 소비자의 욕구를 대신 충족시키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달 말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북한의 대동강 맥주보다 맛없는 한국 맥주’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맥주 애호가들과 많은 네티즌은 이 기사에 큰 공감을 나타냈다. 기사에 달린 수백 건의 댓글에는 “물 탄 것처럼 밍밍한 한국 맥주는 짐승의 오줌이다” “단지 소맥을 말 때나 찾는 폭탄주의 포로다” 등의 부정적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분석 전문회사인 다음소프트가 지난 5년간 블로그·트위터에 올라온 맥주 관련 글 25만 건을 분석한 결과 한국 맥주에 대한 부정적 언급은 36%로 외국 맥주를 부정적으로 언급한 경우보다 10%포인트나 높게 나타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맛은 취향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밖에 없다”면서도 “국산 맥주는 소비자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부정적 평가가 나오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논란을 일으킨 이코노미스트 서울 특파원 다니엘 튜더 역시 “한국 맥주 시장의 지나친 규제와 획일화된 문화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오죽하면 중국 땅에 공장을 짓고 맥주를 만들어 한국에 들여올 생각을 했겠는가. 맥주시장의 진입 장벽이 너무 높아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브루마스터(Brew Master·맥주 제조공정을 관리하는 전문가) 윤정훈(43)씨의 말이다. 윤씨는 미국 대학에서 맥주 양조자 전문과정을 마친 뒤 현지 맥주공장에서 수년 동안 브루마스터로 일한 경력을 가진 전문가다. 일본·미국·유럽 등에서 열리는 각종 세계 맥주대회의 심사위원으로도 활동 중인 그는 소규모로 맥주를 제조하는 ‘하우스맥주’ 업계에서 유명 인사다.

 그는 지난해 3월 한국을 떠났다. 국내 두 곳의 하우스맥주 매장에서 브루마스터로 일했지만 수지타산을 맞추며 사업을 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가장 힘든 부분은 높은 세금과 제한적 유통, 과도하게 요구되는 설비 등 각종 규제였다고 한다. 윤씨는 “내 나라에서 사업을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서글프다”며 “한국의 제도가 바뀌기 전까지는 중국에서 맥주를 만들어 한국에 수출하는 식으로 해 나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관세가 붙더라도 불합리한 제도가 발목을 잡는 한국보다는 사업 여건이 더 낫다는 것이다. 윤씨는 현재 중국 산둥성 옌타이에 맥주제조 공장을 완공하고 수출 관련 인허가 절차만을 남겨두고 있다.

지역 소주회사들도 포기

윤씨가 지적한 과도한 세금은 소규모 사업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문제다. 우리나라는 맥주에 원가 대비 72%를 세금으로 부과하고 있다. 생산 규모와는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적용된다. 한국의 주세는 ‘양’이 아닌 ‘원가’를 과세의 표준으로 하는 ‘종가세’다. 그 때문에 대량 생산을 하면 고정비 분산으로 출고가격이 낮아지므로 대기업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다. 한국을 비롯한 소수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나라가 ‘양’을 기준으로 과세하는 ‘종량세’를 채택하고 있다. 소량이지만 다양한 맛의 맥주를 만들어내는 하우스맥주는 원가가 비쌀 수밖에 없다. 종가세 체제에서는 원가가 높을수록 세금을 많이 내야 하기 때문에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전국 유통망을 독점하다시피 장악하고 있는 대기업 맥주와 달리 하우스맥주는 동일인 명의의 업장 내에서만 맥주를 판매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브루마스터 윤씨는 “수년 전 소규모 맥주 시장에 뛰어들 뜻을 가진 지역 소주 제조회사 몇 군데에서 연락이 와 논의를 한 적이 있다”며 “하지만 국내 시장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아 사업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계획 단계에서 접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수입 맥주가 ‘입맛 빈자리’ 채워

인터넷 맥주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한 맥주 동호회 운영자 이모(32)씨는 “한국의 맥주시장은 5%의 다양성이 보장되는 95 대 5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도 맥주 소비자의 95%는 BMC(버드와이저-밀러-쿠어스로 미국의 3대 맥주 브랜드)를 찾는다”며 “모두 라거(Lager) 스타일의 맥주로 유럽인들이나 맥주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밍밍하다거나 맛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 맥주를 싸잡아 맛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다양한 맛을 충족시키는 소규모 맥주 제조사가 2000개 가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라거 스타일 일색인 우리의 맥주 시장과 완전히 다른 부분이다.

 취미로 집에서 맥주를 만드는 ‘홈 브루잉’ 동호인 김모(35)씨는 “우리 맥주 맛을 비판한 이코노미스트 기자의 고국인 영국은 에일 맥주의 종주국이지만 사실 95%에 달하는 대중은 칼스버그나 하이네켄 같은 라거 스타일의 맥주를 소비한다”며 “그럼에도 하우스맥주 시장이 열려 있어 다양한 소비자의 선택권이 보장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4조원 안팎에 달하는 한국의 맥주 시장은 대기업인 하이트진로와 오비맥주가 양분하고 있다. 지난 상반기 기준으로 국산 맥주시장 점유율은 오비맥주가 55%, 하이트진로가 45%를 기록했다. 국내 전체 맥주시장에서 수입맥주가 차지하는 비율은 매년 꾸준히 증가해 5% 안팎까지 늘었다. 소비자들은 국산 맥주에서 찾을 수 없는 다양한 맛에 대한 욕구를 수입맥주를 통해 해결하고 있는 셈이다. 하우스맥주와는 별개로 좀 더 규모가 크고 전국 유통망을 갖춘 중규모의 맥주 제조사가 나오는 데도 걸림돌이 많은 게 우리 현실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09년부터 유통·시설기준 등에서 진입장벽을 낮추도록 관련 부처에 권고해 왔다. 그 덕에 2010년 말 맥주 제조를 할 수 있는 시설 기준이 일부 완화됐다. 그동안 일반맥주 제조면허를 따는 데 필요한 1850kL의 저장조 시설 기준이 100kL 이상으로 대폭 낮춰진 것이다. 그 결과 78년 만에 제3의 일반맥주 제조면허 업체(세븐브로이)가 생겼다. 하지만 개정된 시설 기준도 미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여전히 턱없이 높은 편이다. 주류 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국세청 등의 강한 반대도 걸림돌이다. 탈세와 위생에 대한 우려가 반대의 주 이유다. 주무부처가 보완책을 마련하기보다는 행정편의주의에 매몰돼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맥주회사 "다양한 제품 만들 기술은 충분”

대기업 맥주회사들은 한국 맥주의 다양성의 부재를 자신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오비맥주 관계자는 “매년 수천 명을 대상으로 소비자 조사를 실시해 고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맛을 구현하고 있다”며 “아직까지 많은 소비자는 시원하고 상쾌하며 목넘김이 부드러운 ‘아메리칸 라거’ 스타일을 찾는다”고 말했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도 “라거 맥주 외에도 에일 등 다양한 맥주를 생산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며 “다만 한국인의 음주 습관이나 기호에 따라 아직은 소량 생산 맥주에 대한 시장성이 형성되지 않은 탓에 라거 외에 다양한 스타일의 맥주를 내놓지 않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맥주 전문가나 일부 애호가는 소비자의 태도도 짚고 넘어갈 부분이라고 말한다. 인터넷 맥주 동호회의 한 관계자는 “맥주를 하나의 완성된 식품으로 보지 않고 단지 취하기 위해서 먹는 수단으로 여기는 술 문화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맥주 고유의 맛을 천천히 음미하며 즐기기보다는 양주나 소주와 섞어 마시는 폭탄주 문화가 그것이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굳이 고비용이 드는 다양한 맥주를 내놓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마이크로브루어리협회 차보윤 회장은 “대형 맥주사들은 철저히 대중의 기호와 시장 상황에 맞출 수밖에 없다”며 “이들이 만드는 맥주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다양한 맥주가 나올 수 없게 돼 있는 주류 정책과 주세 제도가 진짜 문제”라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최준호·장정훈·고성표·박민제·김민상 기자, 김태윤 이코노미스트 기자

※한국 맥주 맛 관련 기사는 이코노미스트 1168호(12월 17일 발행), 1169호(24일 발행)와 월간중앙 1월호(12월 21일 발행)에 공동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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