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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림 예술공간 ‘고리’서 ‘자전거로 쓰는 자서전’ 프로젝트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24일, 신도림예술공간 ‘고리’에서 ‘자전거로 쓰는 자서전’ 참가자들이 자전거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첫 번째 2인용 빨간 자전거가 권기훈·김소연씨의 자전거, 네 번째 점박이 노란 자전거가 강선진씨의 자전거, 다섯 번째 검정 자전거가 이상헌씨의 자전거다.

지난달 24일 오전 10시 서울 신도림 역사. 주요 환승역답게 주말 오전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대형 전자기기 쇼핑몰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통 유리로 구획을 나눈낯선 공간이 보인다. 신도림예술공간 ‘고리’다. 이날은 고리에서 기획한 ‘자전거로 쓰는 자서전’ 프로그램의 마지막 날이었다. 자전거 운전에 서툰 엄마를 위해 장보기용 큰바구니 세발자전거를 만들겠다는 딸부터, 앰프를 장착해 거리공연이 가능토록 만든 ‘2인용 락앤롤 자전거’의 커플까지. 갖가지 연장을 든 모습이 잘 어울리는 9팀의 남녀가 막바지 작업에 한창이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자전거 인구는 500만명에 이른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자출족’이 등장한지도 오래다. 자전거의 인기에 힘입어 고가의 레저형 자전거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다. 그러나 프로그램을 기획한 박지훈(30)씨는 바로 이 점을 안타까워 한다. 그는 “친근함의 상징이던 자전거가 어느새 신분을 나타내는 도구로 전락했다”며 “재활용 자전거도 얼마든지 명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보름간의 모집기간 동안 10팀을 모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평균 5만원으로 내 몸에 꼭 맞는 자전거를 내 맘대로 만든다는데 이보다 더한 기회가 있을 리 없었다. 자전거의 ‘자’ 자도 모르는 여성부터 자전거에 애정이 깊은 남성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자원했다.

오리엔테이션 이후 이들이 가장 먼저 한일은 중고 자전거 시장을 도는 것이었다. 각자 머리 속에서 구상한 자전거 모양과 가장 비슷한 뼈대를 찾으면서도 쓸만한 부품이 많이 남아 있는 질 좋은 중고를 골라야 하는 어려운 미션이었다.

여자친구와 함께 커플 자전거를 만들고자 했던 권기훈씨는 한강 자전거 대여점에서 폐기 직전의 자전거를 구해왔다. 서먹서먹했던 첫 만남도 잠시, 이들은 금새 가까워 질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삶과 자전거에 대한 그간의 추억을 풀어놓아야지만 디자인 할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나를 표현하는 것에 인색했던 사람들이 자전거를 계기로 속마음을 터놓게 됐다. 그야말로 ‘자전거로 쓰는 자서전’이다.

  프로그램의 실질적인 진행자는 월계동에서 ‘자전거 여행’ 자전거포를 운영하는 이장수(48)씨였다. 그는 5시간 동안 자전거의 구조, 동작 원리, 도면 등을 설명하면서 참가자들의 머리 속 구상이 현실이 되도록 이끌었다. 하지만 이씨는 “정작 나는 구경꾼”이라며 웃는다. 제작의 99%를 참가자들 손에 맡기고 그들이 그려온 디자인에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어떤 부품이 더 알맞을지 판단해줬다는 뜻이다. 승용차와 달리 자전거는 탑승자의 몸이 지면에 바로 닿는 운송수단인 만큼 안전성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보통 여성들이 손에 기름 묻히며 일하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하지만 여기선 모든 사람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손에 기름 묻히며 땀을 흘린다. 이씨에게도 색다른 경험이 됐다. 그는 프로그램 참가자들을 기억하고 싶어 중고 자전거 프레임과 부속을 모아 기념 자전거를 만들었다. “비록 탈 수는 없는 뼈대만 남은 자전거지만 가게 한 켠에 모셔두고 싶다”는 그는 “누군가가 ‘이 이상한 물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즐거웠던 이 때의 추억을 얘기해 줄 것”이라 말한다.

  공학을 전공한 사람은 자전거 치수에 맞는 부품을 수학적으로 계산해주고,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은 자전거 프레임에 그림을 그려주기도 하면서 서로서로 협력하는 동안 총 9대의 자전거가 완성됐다. 각자 처음의 구상과 달라진 부분도 많다. 하지만 8주 동안 어깨를 부딪히며 작업한 거라 함부로 굴려선 안되는 자식 같은 존재가 됐다. 자전거를 통해 힐링의 효과를 톡톡히 본 고리는 누구나 자전거를 고치고 만들 수 있는 개방형 공방을 내년쯤 계획하고 있다. 한국 지형에 맞게 개조한 카고바이크(무거운 짐을 운반할 수 있는 자전거)를 만들어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한 봉사활동도 편다는 포부다.

# 아들의 디자인, 아버지의 로망이 되다-이상헌

운동화 매니어인 이상헌(28)씨는 운동화 같은 자전거를 만들고 싶었다. 운동화와 자전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고민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과 가벼움이란 답이 나왔다. 신발끈과 신발끈 사이의 구멍을 연구해 패턴을 따오고자 했다. 하지만 자전거를 직접 만져보니 맘이 바뀌었다. 디자인 보단 실용성을 강조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최대한 심플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디자인적 요소는 바퀴에 모두 집어넣었다. 다른 참가자의 자전거보다 유독 바퀴가 돋보이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바퀴살마다 다양한 컬러가 들어가고, 톱니바퀴 모양의 부분 장식이 덧대져 세련된 작품이 나왔다고 자평한다. 바퀴에 대한 로망이 있는 아버지도 멋스러운 자전거를 타면서 기분 좋으실 듯 싶다고.
 

# 한강에서 자리 펴고 거리공연을, 2인용 락앤롤

자전거-권기훈·김소연 커플 권기훈(32)·김소연(28)씨는 커플이다. 함께 데이트하면서 생산적인 일을 찾고 싶었다. 고리 근처를 지나가다가 모집 공고를 보고 주저 없이 지원했다. 이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 연주하는 취미 밴드 소속이다. 자전거 컨셉트도 자연스레 음악·공연 쪽으로 흘렀다. 커플이 탈 자전거이기 때문에 2인용 자전거를 기본 프레임으로 잡고 자전거 앞 머리에 앰프를 장착했다. 자전거를 타고 한강공원을 데이트하다가 즉석에서 기타 선을 꼽고 언제든 거리 공연을 펼치기 위함이다. 빨간 자전거 프레임에 두사람을 상징할 디자인 요소를 그려놓았다. 누가 봐도 권기훈·김소연의 커플자전거란 사실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권씨는 “지금은 추워서 많이 못 타겠지만 내년 봄이면 우리가 더 예쁜 사랑을 하겠단 기대감이 생긴다”며 웃었다.
 

# 자전거 공포증 타파! 꼬마자전거-강선진

초등학교 1학년 무렵 자전거 사고를 당한 강선진(26)씨는 지금까지 자전거에 대한 공포심을 갖고 있다. ‘자전거=내가 제어할 수 없는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혀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리기도 잘 못하고 운전면허가 없어 드라이브도 즐기지 못했던 그는 이번 기회를 통해 자전거 공포증을 깨기로 마음 먹었다. 그가 꼼꼼히 체크한 요소는 브레이크가 아주 잘 드는 자전거, 작고 가벼운 자전거, 땅에 발이 쉽게 닿을 수 있는 낮은 자전거였다. 길 눈까지 어두운 강씨는 자전거의 외간을 아주 화려하게 꾸몄다. 자전거 곳곳에 점박이 무늬를 붙여놓아 멀리서도 한 눈에 띄게 만든 것이다. 행여 엉뚱한 방향으로 운전하더라도 사람들이 알아보고 안내해 줄 것이란 생각에서다. 도전은 이제 부터가 시작이지만, 그의 손때가 묻어있는 자전거가 그를 안전한 방향으로만 이끌어 주길 기대한단다.

섬세한 손길로 자전거 프레임에 비즈를 부착하고 있는 한 참가자와 바퀴 장식에 한창인 이상헌씨. 참가자들이 자전거 제작 전 미리 그려놓은 도안(왼쪽부터).

info 자전거 공방 정보

● 심란한 공방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7가 영등포역 고가로 79 하자센터 / 070-4268-9921
● 두부공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369-45 / 02-3141-9399
● 두 바퀴 희망자전거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2가 6-2 / 02-777-8008

<글=한다혜 기자 blushe@joongang.co.kr 사진="장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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