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수학실력 뛰어난 형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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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바다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이제 테이프나 음반·오디오 기기가 없어도 PC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언제 어디서든 들을 수 있게 됐다. 그것도 무료로. 그것은 곧 우리나라에서 디지털음악의 대중화가 실현됐음을 의미한다. 거창하게 말한다면 소리바다가 한국 디지털음악의 신기원을 이룩한 셈이었다.

그런 대작(?)이, 오랜 시간에 걸친 연구와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불과 두달만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사실 일환씨와 정환씨가 일찍부터 소리바다(같은 것)를 만들어 내겠노라고 마음먹고 달려든 것은 아니었다. 두사람은 단지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좋아했을 뿐이었다.

형 일환씨는 이미 중학시절부터 컴퓨터에 빠져들어 고교에 진학한 이후에는 상당한 실력파가 됐다. 고교에 다닐 때 ‘학교를 홍보하는 프로그램’을 만들 정도였다고 하니 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힌다. 그러면서도 영어와 수학을 잘 했다. 원하던 대학 진학에 실패한 일환씨는 재수생활을 하다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치른 토플(TOEFL)시험에서 높은 성적(점수는 오프 더 레코드)을 거둬 고교 졸업후 자신이 줄곧 원하던 버지니아공대(Virginia Tech.)에 진학할 수 있었다.

전공은 컴퓨터공학.동생 정환씨는 언주중 3년때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형이 유학갈 때 덩달아 집에서 조기유학을 보낸 것이었다. 정환씨 역시 형처럼 영어와 수학 실력이 뛰어났다. 미국 버지니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전교 석차가 2등이었고 여세를 몰아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에 들어갔다. 역시 컴퓨터공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컴퓨터공학과는 2학년을 마칠 때까지 미분·적분을 비롯한 어려운 수학(數學) 과목을 공부하게 돼 있다. 한국인 학생도 거의 없는 이 학과에서 정환씨는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아 공부하며 1997년말 대학을 마쳤다.

형 일환씨는 동생이 대학 4학년일 때 캘리포니아의 한 컴퓨터게임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에 몸담고 있었다. 그러다 정환씨가 대학을 졸업하면서 둘이 합쳤다. 정환씨의 표현을 빌리면 “형이 같이 사업을 한번 해보자고 꼬셨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컴퓨터게임산업이 한창 뜨고 있던 1998년초. 형제는 버지니아의 집에 석달 가량 틀어박혀 신종 컴퓨터게임 개발에 열중했다. 당시 유행하던 이른바 ‘3차원 액션 어드벤처’게임류였다. 그러나 이들은 게임 개발을 중도에 포기했다. “둘이 해나가기에는 너무 벅찬 작업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새롭게 달라붙은 것이 바로 음악쪽 소프트웨어 개발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곧 지금의 소리바다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젊은이들, 특히 네티즌 사이에서 인기가 높던 컴퓨터 ‘MP3 플레이어’소프트웨어 개발이었다. 쉽게 말해 컴퓨터 안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오디오시스템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들이 개발하는 소프트웨어의 명칭에 ‘소리’라는 말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개발하는 MP3 플레이어 프로그램의 이름을 ‘소리통’이라고 이름지었다. 영어의 ‘soundbox’를 그대로 한글번역했다.‘소리통’은 1998년 중반 무렵 어느 정도 완성 단계에 도달했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 형제를 ‘지금과 같은 운명’으로 바꿔놓는 일이 생겼다. 한국으로의 귀환이었다.

형제의 첫 작품 ‘소리통’은 재빨리 국내 인터넷업계에 소문이 돌았다. 한 업체로부터 “소프트웨어를 계속 개발하면서 사업도 할 수 있는 길을 함께 모색해 보자”는 제의가 형제에게 들어왔다. 일종의 스카우트 혹은 합작(合作) 제의였다. 이런 제의에 따라 양씨 형제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인터넷 열풍이 불어닥치던 1999년 중반이었다.

올 연초 현재 분당의 집으로 이사오기 전까지 두 형제의 집, 정확하게 아버지(양수산·67·전 한국외국어대 법학과 교수)의 집은 서울 창동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파트 현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왼쪽의 3평 남짓한 문간방이 곧 이들 형제의 작업실이었다.

“미국에서 컴퓨터 공부까지 하고 와서 취직할 생각들은 않고 왜 집에서 놀고(?) 있느냐”는 어머니의 채근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형제는 귀국 후에도 줄곧 소리통 소프트웨어 보완작업을 계속 했다. 그러던 어느날 집안에서만 ‘프로그래밍의 귀재’를 자처하던 형 일환씨가 불쑥 미국의 음악파일 공유 프로그램인 냅스터 이야기를 꺼냈다. “야 정환아. 우리나라에도 냅스터 같은 프로그램이 하나 있으면 되게 편리하겠다”면서 “우리가 한번 만들어 볼까”하는 것이었다. 형제는 미국에 있을 때부터 냅스터를 이용해온 터였다.

냅스터는 자체적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갖추고 이용자들이 그 데이터베이스에서 자신이 원하는 곡을 찾아 전송받는 시스템이다. 이용자는 냅스터 사이트에 들어가 냅스터가 갖고 있는 ‘음악창고’에서 자신이 원하는 곡을 찾아 받으면 된다. 그러나 양씨 형제는 이보다 더 진일보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굳이 자체적으로 음악파일 데이터베이스를 갖고 있을 것 없이 무수한 개인 네티즌과 네티즌끼리 음악파일을 서로 공개하고 검색하고 전송받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소리바다의 우수성은 사실 여기에 있었다.

▷「소리바다」의 운명

  • 법정으로 간 한국 디지털음악의 신화
  • 거대 인터넷 음악공동체 형성
  • "잘 해결되리라 낙관한다"
  • 유료화 불가피할 듯
  • 권태동 기자
    자료제공 : 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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