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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바둑이야기 - ‘반상의 야전사령관’ 서봉수 ④·(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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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박치문 바둑전문기자

서봉수 9단은 바둑사에서 극히 이례적인 존재다. 그는 뒷골목에서 바둑을 배웠지만 세계챔프에다 진로배 9연승 등 바둑사에 남을 대기록을 세웠다. 서봉수는 ‘바둑’ 외엔 다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서봉수는 지금도 승부의 환상을 꿈꾸며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야생의 생명력과 된장 냄새 물씬 풍기는 ‘서봉수’라는 이미지는 뇌리에서 살아남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파죽의 9연승 1997년 진로배는 서봉수 독무대였다

오다케 꺾은 응씨배…일본 바둑 침몰의 계기

도사 같은 이창호 9단도 어린 시절엔 골목길을 눈물을 흘리며 걷곤 했다. 조훈현 9단이 비 내리는 밤 우산도 없이 횡단보도의 신호등 아래 망연히 서 있던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고수들은 허허 웃으며 패배를 받아들일 것 같지만 실은 반대다. 같은 프로라도 패배에 둔감할수록 하수이고 상처가 클수록 고수라는 게 내 생각이다.

 잔혹한 패배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고수들은 큰 승부를 원한다. 맹수의 본능이다. 서봉수 9단도 승부를 갈구했고, 드디어 ‘생애의 승부’라 할 만한 일전을 맞이하게 됐다. 일본의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 9단과의 제2회 응씨배 결승전은 2대 2가 되었고, 드디어 내일이면 우승자를 결정할 마지막 대국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한데 이 대목에서 서봉수가 보여준 모습은 실로 뜻밖이었다. 서봉수는 과장하자면 덜덜 떨고 있었다. 스승도 없이 뒷골목 기원에서 바둑을 배웠고 헝그리 정신으로 잡초처럼 성장해온 실전바둑의 대가 서봉수가 ‘생애의 승부’ 앞에서 떨고 있는 모습은 그래서 지금도 미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1993년 5월의 봄날, 서봉수와 나는 바둑판을 들고 싱가포르의 공원을 찾았다. 해는 따뜻했고 잔디는 포근했다. 거기서 바둑판을 펴고 ‘내일’에 대해 얘기했다. 서봉수는 오타케가 프로들이 잘 쓰지 않는 ‘고목(高目)’을 둘 것이라며 걱정했다(고목을 두거나 소목을 두거나 그게 무슨 대수인가. 말도 안 되는 걱정이라고 일축했지만 이튿날 오타케는 진짜 고목을 들고 나왔다. 동물적 본능이랄까, 아무튼 놀라운 예감이었다).

 서봉수는 동물원의 동물들을 구경하며 서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특히 악어에 끌리는 모습이었다. 악어는 아주 오랫동안 미동도 없이 눈을 감은 채 죽은 듯 엎드려 있었다. 한낱 악어도 원하는 먹이를 얻기 위해선 저토록 수도승 같은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에 그는 감동을 받은 듯했다. 하물며 세계 챔프와 40만 달러가 거저 얻어질 수 없는 것 아닌가 반성하는 모습이었다.

제2회 응씨배 결승에서 오타케를 3대2로 꺾고 우승컵과 40만 달러의 상금을 받은 서봉수 9단. [중앙포토]

 이튿날(93년5월20일) 싱가포르 마리나 만다린 호텔에서 서봉수의 흑으로 결승5국이 시작됐다. 흑은 양 화점. 백은 소목 하나를 두더니 제4착에서 고목을 두었다. 불가사의하게도 예감은 적중했고 순간 가슴이 화살을 맞은 듯 철렁했다. 바둑은 불과 59수에서 빗나가기 시작했다. 흑의 빗나간 행마에 편승해 오타케의 ‘미학’은 펄펄 날았다. 맥을 짚고 급소를 연타하며 국면을 완전 장악했다. 점심시간이 됐을 때는 ‘흑 재기 불능’이란 분석이 파다했다. 검토실엔 ‘살아 있는 기성’으로 불리는 우칭위안(吳淸源) 9단과 ‘철녀’ 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이 줄곧 이 판을 연구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거의 평생을 보낸 우칭위안 선생이 오타케보다 서봉수 쪽에 우호적인 건 조금 놀라웠다. 일본에서 시합 출전을 거부당하고 떠돌고 있던 루이는 당연히(?) 서봉수 편이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흑 절망”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일반적인 강수나 전투로는 이미 판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점심시간 때 서봉수는 방에 틀어 박혀 배달된 식사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바둑만 연구했다. 나는 그에게 검토실의 분위기를 전해 줬다. 오후 대국에서 서봉수는 미치기 시작했다. 접바둑에서 하수를 상대하듯 판을 휘저으며 적의 칼날 앞에 목을 훤히 드러낸 채 결사항전을 거듭했다. 반면 오타케는 ‘사고만 나지 않으면 이긴다’는 생각에 싸울 의사가 하나도 없었으나 흑의 거듭되는 무모한 도전을 놔둘 수도 없어서 판은 점차 아수라장으로 흘러갔다. 서봉수는 이후의 일에 대해 “아무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우변에서 흑 대마가 죽었고 중앙에서 백 대마를 쫓고 있었지만 잡아도 지는 형세였다. 한데 오타케의 허망한 착각과 함께 연거푸 기적이 일어났다. 죽었던 흑 대마가 백을 잡고 부활하며 바둑은 흑의 대 역전승으로 끝났다. 백이 이기는 코스는 수만 갈래였다. 흑이 이기는 코스는 실전 딱 한 갈래였다. 하나 서봉수는 특유의 잡초적 본능과 벼랑 끝에서도 되살아나던 내기바둑 시절의 경험으로 그 코스를 찾아냈다. 서봉수는 3대 2로 우승했고 40만 달러의 상금도 차지했다.

 일본바둑은 이 패배와 더불어 바다 깊숙이 침몰했고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 대신 한국바둑이 세계를 지배했다. 지금 생각하면 서봉수와 오타케의 이 결승전은 ‘한국 실전류의 부흥’과 ‘일본미학의 퇴조’를 알리는 분수령 같은 한 판이었다. 바둑내용을 이겼더라도 승부에서 지면 그로부터 역사가 바뀐다. 그게 승부가 지닌 불가사의한 힘이다.

국가대항전 진로배…‘4천왕’ 면모 유감없이 발휘

1997년 진로배에서 숨죽이고 있던 야생마 서봉수는 또다시 미친 질주를 시작했다. 진로배는 한·중·일 3국의 국가대항전으로 현 농심배의 전신이다. 연승전이기에 이기면 계속 다음 선수와 대국할 수 있다.

 제5회 진로배의 한국대표는 조훈현 9단-이창호 9단-유창혁 9단-서봉수 9단-김영환 4단이었다. 96년 12월의 개막전에서 중국 선봉 위빈 9단은 한국의 김영환 4단을 꺾었고 다음날 일본 아와지 9단을 꺾어 2연승. 여기서 한국팀 4장 서봉수 9단이 등장했다. 서봉수는 첫판에 강적 위빈을 가볍게 꺾더니 조금 만만해 보이는 일본의 히코사카 9단을 맞이해서는 고전 끝에 반 집을 이기고 연승을 이어나갔다. 15일엔 중국의 신흥 강자인 창하오 9단마저 극적인 ‘반 집’으로 제치고 3연승. 비틀거리고 힘들어 하면서도 힘든 고비를 넘긴 서봉수는 이후 파죽지세로 4승을 추가한다.

 7연승을 거둔 서봉수는 97년 1월 31일 일본팀 주장 요다 노리모토 9단과 맞서 또다시 극적인 반 집 역전승을 거둔다. 8연승을 거둔 서봉수의 마지막 상대는 중국 주장 마샤오춘 9단. 당시 이창호와 함께 세계바둑의 ‘양강’으로 인정받던 실력자였다. 서봉수가 이 판마저 이기면 전대미문의 9연승과 함께 팀 우승까지 결정짓게 된다. 바둑사에 남을 대기록이 세워질지 모른다는 소식에 대국장인 베이징 쿤룬호텔엔 중국 기자와 기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당시 베이징은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 의 서거로 10일간의 국장이 치러지고 있어 거리 곳곳엔 조기가 계양되고 모든 문화행사가 취소된 상태였다. 진로배만은 중요한 국제행사라 특별히 허락된 케이스였다. 또 북한 황장엽 비서 망명으로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 중이어서 한국선수단이 묵은 쿤룬호텔 14층은 폐쇠회로로 출입을 감시하고 인터뷰도 막는 등 보안이 삼엄했다.

 신기한 것은 서봉수였다. 지금까지는 역전 반 집 승을 세 번이나 거두는 등 온갖 곡절 끝에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8연승을 거둔 서봉수였지만 이 판은 달랐다. 마치 정해진 운명을 가듯 초반부터 앞서나가더니 여유 있게 불계승을 거뒀다.

 이 판을 두고 김인 9단은 “서봉수 일생의 명국”이라 했고 조훈현 9단은 “나도 생각지 못한 엄청난 강수 일변도”라고 평했다. 중국 신문은 “한국 4천왕이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난다”고 썼다. 바둑사의 대기록인 진로배 9연승은 이렇게 탄생했다.

 서봉수는 실력이 미천하던 입단 초기에 특유의 돌파력을 보이며 ‘명인’에 올랐다. 하지만 그 후엔 또 계속 졌다. 응씨배 우승으로 세계챔프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고 진로배 9연승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타고난 천재성으로 어느 날 전속력으로 꼭대기까지 치고 올라가곤 했지만 밑천이 짧은 탓인지 정상에 오래 서진 못했다. 더구나 서봉수는 세상사에 어둡다. 하지만 그는 한눈 팔지 않고 자신의 운명이라 할 바둑의 길을 계속 간다. 지금도 인터넷에 들어가 손자뻘 연구생들과 10초 바둑으로 트레이닝을 하고 권갑룡 도장에 사범으로 취직(?)해 입단을 꿈꾸는 소년들을 훈련시킨다. 환갑이 된 지금도 승부의 꿈, 또는 환상을 버리지 않고 살아간다. 바둑팬들은 그런 서봉수를 막연히 좋아한다.

 가끔은 서봉수 9단이 “세계를 떨어울린 ‘4천왕’ 중에서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는 유일한 기사”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수많은 선후배들이 세계대회 때마다 외국에 단장으로 나가지만 ‘서봉수 단장’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왜일까. 자업자득인가. 아니면 서봉수 9단이 너무 서민적이고 너무 솔직한 탓일까. 나는 한국기원이 그를 무시하지 않고 존중해 주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서봉수 9단 같은 인물은 귀하다. 우리네 상식과 통념으로 재단해선 안 된다. 그는 우리의 상식보다 조금 높은 곳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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