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쇳소리 나지 않는 개혁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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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2월 출범과 더불어 김영삼(金泳三)정부는 신경제 1백일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쇳소리' 나는 정책들을 마구 토해냈다.

일례로 기업 분할 명령제. 재벌 그룹의 계열 기업을 임의로 잘라내는 권한을 정부가 보유하겠다는 것이다. 투자 회수 명령제. 재벌 계열사에 대한 투자 자금을 강제로 회수하도록 정부가 명령하겠다는 말이다. 그밖에도 많았다.

정주영(鄭周永)회장의 대통령 출마로 정권의 심기가 크게 불편했던 터라 재계로서는 이 '칼바람' 개혁 포고에 모골이 송연했었다. 당시 측근 실세 하나가 사사로운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느그, YS 성깔 알제? 틀림없이 할 끼다."

그러나 개혁은 대통령의 성깔과 무관했다. 국제통화기금 치욕 속에 물러나기까지 재임 5년 동안 기업 분할이든, 투자 회수든 입도 벙긋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경제 1백일 작전의 최대 개혁(!)은 역설이지만 금융실명제 유보였다. 기업.금융.공공.노동 부문의 4대 개혁을 내건 김대중(金大中)정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자금 1백60조원으로 도배한 기업 개혁과 금융 개혁은 물론이고, 노사정 편법으로 유인한 노동 개혁 역시 참담한 좌절로 끝나고 있다.

정부가 가장 먼저 시범을 보였어야 할 공공 개혁이 가장 더딘 형편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나는 지난 개혁의 실패를 야유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실패의 전철을 피하도록 권고하려는 것이다.

*** 교과서 이론과 다른 현실

계열 분리 청구제 얘기를 10년 만에 다시 듣는다. 명령과 청구가 실제로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으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마련한 '재벌.금융 개혁 방안'에 이것이 포함됐다고 한다.

공정거래위원회에의 사법 경찰권 부여를 비롯해 쇳소리와 칼바람 도수가 과거와는 비교조차 안될 만큼 독한(?) 정책들이 망라돼 있다. 여기에 인수위 구상이나 당선자의 의지가 얼마나 무겁게 실렸는지 나는 헤아릴 능력이 없다.

다만 이것이 새 정권의 재벌 수술 예고든, 정권 교체기마다 치르는 통과 의례든 재계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위의 실패 회피 권고와 관련해 나는 특히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먼저 인수위가 준비하는-그렇게 보도되는-각종 개혁 과제가 국민 경제에 적절하냐는 질문이다.

그 대답이야 기다릴 필요조차 없는 것이겠지만, 경제 현실이 교과서 이론과 크게 다르다는 점은 유념하기 바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전문 경영인과 사주를 무슨 선악의 구도로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는데 전문 경영인 체제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과다한 보수, 주가 위주의 경영, 회계 부정 등의 폐해가 전문 경영의 본산지에서 계속 터져나오기 때문이다. 기업의 투명성 제고와 지배구조 개선에 우리 국민 누구도-재벌 총수마저-반대하지 않겠지만, 거기에 담긴 위험도 같이 계산해야 한다.

섣부른 세계화 찬가와 설익은 '글로벌 스탠더드' 설교가 어떻게 국가 경제를 거덜냈는지는 외세의 기업 사냥과 엄청난 국부 유출이 증명한다.

다음으로 그 개혁이 정녕 가능하냐는 질문이다. 그것은 정부가 재계에 밀리느냐 아니냐의 싸움이 아니다. 예컨대 정부가 관리하는 각종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는 강화하자면서, 재벌 산하 금융 기관이 계열사에 행사하는 의결권을 금지하려는 처사는 무엇보다도 형평의 논리에 반한다.

나는 결코 시장 맹신자가 아니지만, 정부의 이런 차별 행위는-월권은-설득과 합의를 통한 시장 개혁을 어렵게 한다. 정부는 한때 '주먹으로' 그룹 비서실을 없앴고, 그래서 재벌은 구조조정본부를 만들었으나 그 기능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정부가 다시 구조조정본부를 없애라면 재벌은 경리과에라도 같은 일을 맡길 것이다. 그 헛수고를 왜 되풀이하려는가?

*** 쿠데타 아닌 일상이 돼야

출범도 하기 전에 재계와 빚을 마찰을 걱정했는지 盧당선자는 재벌 개혁의 점진적.자율적.장기적 추진을 약속했다. 노무현 정권의 개혁 행로가 쇳소리와 칼바람을 부를지 점진과 자율로 기울지, 그것은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다만 "지금은 반대하고 있으나 뒷날 잘했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 참고 따르라"는 식의 개혁 밀어붙이기만은 꼭 피하기 바란다. 역대 정권이 빠진 개혁 실패의 함정이 바로 이 독선이었다.

새 정권에 새로 전하거니와 개혁은 쿠데타가 아니라 일상의 생존방식(modus vivendi)이 돼야 한다.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