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현대-LG반도체 '빅 딜'평가 정태수 ADL지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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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월 LG반도체를 인수한 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가 세계반도체 경기불황에 밀려 부실의 늪에 빠진 채 나라경제를 흔들고 있다. 정부는 당시 반도체 공급과잉 등을 이유로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을 강행했다.

'다 같이 살기 위한 것' 이라는 게 정부의 논리였지만 2년이 지난 지금 '더 큰 부실덩어리' 만 남긴 꼴이 됐다.

빅딜을 진행할 때 현대.LG의 반도체 경쟁력 평가를 맡아 빅딜의 방향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아서디리틀(ADL)의 정태수(鄭泰秀.45.사진) 한국지사장을 만나 최근의 심정을 들어봤다.

鄭지사장은 당시 컨설팅보고서에서 '현대 우위' 라고 판정한 것 때문에 정부가 현대그룹에 특혜를 줬다는 논란에도 휘말려 있다. 그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10일부터 열리는 국회 국정감사의 증인으로 선다.

- 하이닉스에 대한 감회가 남다를 텐데.

"빅딜 보고서에는 현대가 LG보다 앞선다는 평가보다 더 큰 메시지가 있다. 현대는 LG를 인수하는 즉시 반도체를 제외한 모든 사업부문을 정리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정몽헌(鄭夢憲)회장에게도 이런 점을 말해줬다.

그러나 현대는 LG를 인수한 뒤에도 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통신사업 등을 팔지 않았다. 이들 사업이 일시적으로 장사가 잘 되자 머뭇거렸던 것이다. 하이닉스가 최근 자금난에 몰려 뒤늦게 후회하고 내다 팔려고 했는데, 이미 때를 놓친 것이다. "

- 현대는 중요한 메시지를 왜 무시했나.

"빅딜은 한 주체가 기획해 쭉 밀고 나가야 하는데 그렇게 안됐다. 또 하이닉스의 인력이 많이 빠져 나갔다. 훌륭한 인재들이 벤처로, 미국으로 샜다. 보고서에 근거한 시나리오와 비교하면 실천되지 않은 게 너무 많아 아쉽다. "

- 그렇다면 하이닉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시장원리에 따라 부도를 내야 하나, 국가경제를 위해 살려야 하나.

"국가경제 측면에서 하이닉스는 경쟁력을 가진 회사가 분명하다. 부채가 있다고 쓰러뜨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이닉스는 생산능력 등 반도체 산업의 본질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요즘 전문가들조차 하이닉스의 유동성 위기와 반도체 사업능력을 혼동하고 있다. 하이닉스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면 안된다. 이 회사는 반도체 값이 폭락해서 그렇지 지난해까지만도 영업이익을 냈다.

반도체 값이 이렇게 폭락할 줄은 당시 보고서 작성 때도 예측하지 못했다. 2백56메가 D램 값이 6개월새 34달러에서 4~6달러로 폭락하는 데 누가 견딜 수 있겠느냐. 경영의 귀재라는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잭 웰치가 나와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탄탄하다던 삼성전자도 어려울 정도다. 하이닉스의 경우 부채가 삼성보다 많아 타격을 받고 있을 뿐이다. "

- 과다한 부채가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는 얘긴가.

"부채의 성격(장기.단기비중)등을 면밀히 따져 판단해야 한다. 전문가들이 이 회사를 더 자세히 들여다 보고 최종 결론을 내야 한다. "

- 정부의 현대 특혜 의혹과 관련해 매년 국감에 증인.참고인으로 불려다니는데.

"국회의원들이 질문과 추궁을 논리적으로 하지 않아 힘들다. "

- 빅딜 평가 전에 정부측과 교감했다는 설도 있는데.

"평가 전에 정.재계 인사들을 두루 만났다. 그들에게서 받은 인상은 반도체 빅딜에 대해 상당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구나 하는 거였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일이니 ADL의 명예를 걸고 평가해달라' 고 말했다. "

- 정몽헌 현대 회장과는 가깝게 지내나.

"빅딜 이후 가끔 만났다. 鄭회장은 나를 만날 때마다 '반도체는 국가적 사업이라 책임이 막중하다. 최선을 다해 경영을 잘 해서 모든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겠다' 는 의지를 보였다. 지금도 개인적으로 훌륭한 경영자라고 생각한다. "

- 구본무 LG회장도 만났나.

"빅딜 이후 조찬모임에서 한번 만났으나 얘기는 안했다. 올 초 고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상가에서도 LG측 임원의 소개로 인사만 했다. "

- 빅딜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시각도 있다. 시장이 어렵다면 두 회사 중 한쪽이 무너져도 다른 쪽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 데 빅딜로 부실이 더 커져 사태만 악화시켰다는 지적이다.

"현 상황에서는 두 회사 모두 날아갔을 것이다. LG가 현대전자를 가져 갔어도 반도체 값이 이렇다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LG도 인수과정에서 빚을 많이 떠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 당시 평가결과를 발표한 뒤 기자회견장에서 울먹였는데.

"LG에서 '능력없는 회사가 엉터리 보고서를 냈다' 고 비난한 게 안타까웠다. ADL의 역사를 말하면서 울컥했었다. 우리 회사는 1백15년의 역사를 가지고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수립에 참가하는 등 한국에 공헌한 점이 많다. "

- LG는 한때 ADL의 불공정 평가를 고소하겠다고 했는데.

"오히려 우리가 명예훼손으로 LG를 고소했어야 한다. 빅딜 이후 근거 없이 비난받은 것에 대해 스스로 분을 삭이는 게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크게 봐야 하지 않겠나. "

김시래.김남중 기자 sr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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