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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문인들 앞장선 단죄에 충격"|민족문학작가회. 김지하 시인 제명에 부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최근 민족문학작가회의의 김지하 시인 제명조치<본행13일(일부지방 14일)15면 보도>를 둘러싸고 문단에 논란이 일고 있다. 작가 이창동씨는 민족문학작가회의 결정이 문학단체 스스로 표현과 양심의 자유를 저버린 것이란 내용의 글을 17일 본지에 보내왔다. 이씨의 글을 전재한다. 【편집자주】
최근에 저 자신도 소속하고 있는 민족문학작가회의라는 문인단체에서 김지하 시인을 제명시켰다고 합니다. 얼마전 그가 지상에 발표한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라는 글이 회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은 「자유실천 문인협회」였습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말할 권리조차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었던 혹독한 유신체제 아래에서 표현의 자유를 되찾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결성된 단체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미 김지하 시인은 『오적』 등의 시로 권력에 맹렬하게 저항하다 오랜 세월 옥고를 겪어야만 했고, 또한 김지하란 존재가 있었기에 더욱 많은 문인들이 힘을 모아 싸울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이제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고 회원의 자격을 박탈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기 위해 영문으로 번역해 해외문인단체에까지 보내겠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저는 이 놀랍고 참담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참으로 난감합니다. 문제가 된 그의 글은 최근의 과격한 운동행태에 대해 격렬한 노여움을 담고있는 글입니다. 그는 현재의 학생운동이 그 방법으로나 방향에 있어 명백히 잘못되어 있다고 비판하고 스스로 반성과 방향전환이 없는 한 역사의 오류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의 주장에 대해 동조하지 않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저 자신도 그 글을 읽으면서 젊은이들의 잇따른 분신이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저질러진 한 젊은 학생의 비극적인 죽음을 자신의 몸을 불사르면서까지 역사발전의 동인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통절한 노력이라는 사실을 굳이 외면하고 「생명말살」의 충동으로만 매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강한 의문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 글을 자신의 소신이나 충정으로 발표한 이상 그 때문에 비난을 받든지, 공감을 얻든지 얼마든지 그것은 전적으로 그분이 감당해야할 몫입니다.
문제는 그가 자신이 쓴 글 때문에 동료문인들에 의해 단죄되고 축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46대 1이라는 압도적인 다수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저를 절망하게 합니다.
신문보도에 의하면 이번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참다운 민족민중문학을 이룩함을 목적으로」하는 작가회의 정관 제2조를 위배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참다운 민족 민중문학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글을 쓰는 자 각자가 끊임없이 모색하고 노력해야 찾을 수 있는 길이리라 생각합니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민족민중문학이란 이름으로 시인 김지하의 이름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시인 김지하의 이름 위에 단호히 붉은 줄을 그을 만큼 우리 모두는 과연 얼마나 떳떳하며, 얼마나 선명한가 저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그가 이제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애 대부분을 던져 한시대의 양심을 지켜온 그의 존재까지 대열 밖으로 떼밀어내고 가야할 길이라면 도대체 그 길은 어떤 길입니까. 또한 그만한 정도의 비판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민족민중문학이고 진보적 문학인의 길이라면 그것의 개념은 과연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이번 결정이 표현의 자유에 관계 된 것이란 사실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있어 표현의 자유란 공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글을 쓰는 사람들의 단체에서 스스로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인지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사회에 이념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도 다른 사람의 생각과 사상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양심수를 석방하라는 주장을 하는 것도 인간의 양심을 어찌 법과 제도가 제약할 수 있겠는가 하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쪽으로는 양심수석방을 외치면서 어떻게 동료문인의 양심을 단죄한단 말입니까.
어떤 분은 그 글이 설사 그의 양심에 의한 것이었다 해도 결과적으로 현정권에 악용되지 않느냐는 반론을 제기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그 글을 쓴 사람의 정신까지 단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을 「북한에 악용 당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감옥에 보냈던 역대 독재정권의 발상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숱한 모순과 잘못을 알고 있습니다. 현실이 잘못돼 있으므로 개혁과 진보를 이루어 내야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 개혁과 진보가 이루어진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세상이 될 것인가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다수의 이름으로 개인의 정신과 양심을 단죄할 수 없다는 원칙은 보장되는 것이어야 할 것 입니나. 그것이 인류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소설가 이창동씨 민족문학작가회의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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