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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 페미니즘까지 버무린 ‘젊은 연출’ 5시간 대작 빛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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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연극 ‘이 불안한 집’은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이다. 영국 극작가 지니 해리스의 작품을 김정 연출이 5시간 대작으로 만들었다. [사진 국립극단]

연극 ‘이 불안한 집’은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이다. 영국 극작가 지니 해리스의 작품을 김정 연출이 5시간 대작으로 만들었다. [사진 국립극단]

트로이 함락을 원한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문성복)은 신탁을 받아, 순수한 맏딸 이피지니아(홍지인)를 제물로 바친다. 분노한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여승희)는 남편을 살해한다. 아버지를 잃은 남매 오레스테스(남재영)와 엘렉트라(신윤지)는 또다른 복수의 칼을 간다.

기원전 458년 고대 그리스 최대 축제였던 디오니소스 축제 비극 경연의 우승작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이었다. 오늘날 비극 예술의 원형이자 ‘엘렉트라 콤플렉스’(딸이 어머니를 증오하고 아버지에게 집착하는 심리)를 낳은 작품이다. 이를 현대화한 연극 ‘이 불안한 집’이 지난달 31일부터 오는 24일까지 서울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김정

김정

영국 극작가 지니 해리스의 2016년 작품을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손님들’, 2017) 수상 연출가 김정(39)이 이번에 한국 초연했다. 원작처럼 3부 구성이다. 고전을 재해석한 1·2부, 현대 정신병원을 무대로 엘렉트라 콤플렉스 환자와 의사를 그린 3부까지 공연 시간 5시간에 달한다. 요즘 드문 대작이다. 공연계에선  만만찮은 대작에 덤벼든 젊은 연출가의 패기를 반기는 분위기다. 심재민 연극평론가는 “고전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의 복권을 신들이 옹호하는 전개라면, 김정 연출은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페미니즘 색채, 퀴어까지 가져왔다. 깊이감은 아쉽지만, 영상세대에 호소할 만한 대중적 연출”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7일 중앙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김정 연출은 2500년 살아남은 고전의 힘을 “신의 영역까지 다룬 방대한 서사”와 “인간 본성을 흔드는 연극성”에서 찾았다. “연극성이란 실제 사람이 온몸바쳐 돌진하는 신체성이라 생각했다. 트렌디한 드라마적 연기와 다른 연극적 표현들을 해내고 싶었다.”

아가멤논 역 문성복은 187㎝, 클리템네스트라 역의 여승희는 173㎝ 큰 키다. 김 연출은 “고대의 원형처럼 거대한 인간을 보여주고 싶어 무대도 2층 구조로 신들의 조각상이 서있는 듯한 구도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왕비의 시녀 이안테(성근창)와 파수꾼(송철호)을 남성 배우로 캐스팅해 퀴어 섹스신을 연상시킨 부분에 대해선  “주연 배우들의 큰 키와 강렬한 존재감을 나눠 가져가기 위해 여성 배역을 남성으로 바꿨다”고 했다. “해리스 원작의 폭력·약·섹스가 범벅된 퇴폐적 부분을 오히려 털어내고 중심 서사에 집중했다”면서다.

김 연출은 이 작품의 주제를 ‘희망’이라고 했다. “어쩌면 작은 사탕 같은 것 하나가 비참한 세상을 바꾸는 건 아닐까. 관객에게 그 답을 맡기고 싶었다.”

5시간 넘는 극도 하나의 체험이라는 그는 “해외엔 이런 공연이 많다. 우리 관객한테도 이런 선택지가 늘어나길 바란다”고 했다. 이번 도전에 대해 “내가 시도하고 설득력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나뿐 아니라 다음 세대 창작자가 할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들겠다는 마음이 있었다”는 그는 “한 시절을 풍미했지만 명맥이 끊긴 우리나라 사극에도 도전하고 싶다. 갈피를 못 잡는 우리 시대 이전의 굵직한 이야기로 현재를 반추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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