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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이승택 “비슷한 것은 가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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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돌덩어리처럼 딱딱하다’.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 중 하나입니다. 세상에 폭신폭신한 돌덩어리는 없으니까요. 백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마에서 구워져 나온 백자라면 물렁물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엇을 본 것일까요. 지금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 전시장엔 그런 상식을 뒤엎는 작품이 즐비합니다. 여기저기 놓인 돌과 옹기, 백자엔 노끈의 힘에 눌린 자국이 역력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작가는 노끈으로 캔버스를 묶는가 하면, 마치 부조처럼 캔버스 위에 노끈을 독특한 패턴으로 배치해 입체 추상화를 완성했습니다. 노끈 자국이 역력한 여러 개의 항아리를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거나 긴 탑처럼 쌓아 올린 것은 어떤가요. 항아리가 수평으로 배치된 장독대만 보아온 이들에겐 영락없는 ‘거꾸로’ 장독대입니다. 여기에 거침없는 유머로 무장한 ‘털(毛) 난 캔버스’까지···.

‘매어진 돌’, 1989, 21(h)x27x16㎝. [사진 갤러리현대]

‘매어진 돌’, 1989, 21(h)x27x16㎝. [사진 갤러리현대]

‘도대체 누가 이런 작업을 했을까?’ 궁금해하던 관람객들은 작가가 1932년생인 것을 확인하고 깜짝 놀랍니다. 또 그의 이런 실험적인 작업이 50년대부터 후반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지속돼왔다는 사실에 다시 놀랍니다. 이렇듯 이승택(90) 작가의 개인전 ‘언바운드((Un)Bound)’는 ‘거꾸로 생각하기’의 끝판왕을 보여줍니다.

그는 왜 이런 작업을 해온 걸까요. 2020년 세계적인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묶기’라는 작업으로 재료의 물성(物性)에 대한 착시를 일으키는” 일이 흥미로웠다고 말했습니다. 반전(反轉)효과를 노린 트릭이었던 것이죠.

이승택은 한국 실험미술 대표 작가입니다. 홍익대에서 조각을 전공한 그는 전통적인 조각의 재료 대신 옹기, 고드랫돌, 노끈, 비닐 등을 작품에 썼고, “실내 벽면이 싫어 바깥으로 나가” 바람을 보여주겠다며 천을 휘날리는 퍼포먼스도 벌였습니다. 일찌감치 “‘뒤집기’와 ‘비틀기’ 없이는 예술이 나올 수 없다”고 믿은 그는 “남과 비슷한 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지요. “어찌하여 비슷함을 구하는가? 비슷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진짜는 아니다”라는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글을 곱씹으며 스스로 택하고 걸어간 외길이었습니다.

그의 작업세계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겨우 10여 년에 불과합니다.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을 받은 후 세계 평론가들과 큐레이터가 그를 주목했습니다. 2017년 뉴욕 레비고비 갤러리, 2018년에 런던 화이트 큐브 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열렸습니다.

고정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틀고 부정하며 끊임없이 실험해온 그의 ‘악동(惡童) 정신’이 뒤늦게 빛을 보고 있습니다. ‘뒤집기의 장인’ 작가 인생에도 흥미진진한 반전(反轉)이 일어났습니다. 7월 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