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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분노는 컸지만 이성적이었던 시민들의 촛불집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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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순실 국정 농단 게이트 이후 처음 서울 도심에서 열렸던 29일 청계광장 촛불집회는 이성적이어서 오히려 무서웠다. 본격적인 시위가 시작되기 전인 오후 5시 이전부터 광장 한 블록이 꽉 찰 정도로 인파가 몰려들었다. 가을 추위가 닥친 천변의 저녁 날씨는 생각보다 쌀쌀해 두꺼운 옷깃을 자꾸 여미게 했다. 이런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동서남북에서 인파가 꾸준히 몰려들었다. 늦은 밤 행진이 시작된 후로 일부 구간에서 차로를 막고 경찰과 대치하는 크지 않은 충돌이 벌어졌다. 하지만 전반적으론 시위 내내 시위대가 차도를 막는 등의 무질서는 없어 경찰 차벽으로 막힌 곳을 제외한 차도로는 차량이 오갈 수 있었다. 서울경찰청장이 “시민들이 경찰의 안내에 따르고 이성적으로 협조해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발표했을 정도였다.

시위 참가자들은 한눈으로 봐도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일상복에다 머플러를 두르고 핸드백이나 색을 멘 부부, 친구, 연인, 부모자녀로 보이는 사람들. 그들은 길거리에 놓인 종이컵과 양초가 담긴 박스를 보며 ‘이걸 가져가도 되는지’ 서로 상의했고, 여기저기 마련된 연단에서 누구든 자유토론을 하라고 권유해도 옆 사람만 멀뚱멀뚱 쳐다볼 정도로 평소 시위와는 무관하게 살아온 시민들이었다. 운동권과 노조, 깃발부대의 전문시위꾼이 거의 참여하지 않은 순수한 시민 집회에 자유 의지로 참여한 시민들이 경찰 추산 1만2000여 명(주최 측 추산 2만여 명)이나 됐다.

‘대통령 하야’를 한목소리로 외쳤지만 살기 어린 분노나 정략적인 극렬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말 창피하다” “이건 나라도 아니다” “어쩌다 대한민국이 이 지경이 됐느냐”는 한탄과 한숨, 그리고 슬픔이 광장을 지배했다. 이런 주말 집회는 앞으로도 몇 차례 더 예정돼 있다. 이번 시민집회는 극렬하지 않았으나 시위 형태와 내용만으로도 평범한 시민들의 분노와 허탈을 충분히 전달했다. 남은 시민집회도 깨어 있는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불순한 동기를 가진 전문시위꾼들에게 정략적으로 이용당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이성적인 시민의 저항 의지를 표출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