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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록 박정희시대]25.한일 막후교섭 시작

    한.일관계는 61년 6월초 박정희 (朴正熙) 의 문경보통학교 제자 전세호 (錢世鎬.당시 재일 한국학생동맹위원장) 란 인물의 등장으로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그는 "혁명과업을 돕

    중앙일보

    1997.10.16 00:00

  • (3980) - 제80화 한일회담 (179)

    북송 제1진이 떠나기 사흘전인 59년12월11일 유태하주일대사는 일본외무성으로 「후지야마」외상을 찾아가 우리정부의 최종 경고각서를 수교하고 다시 한번 즉각 중단을 촉구했다. 이 장

    중앙일보

    1984.03.31 00:00

  • (3970)한일회담 한국대표단-제80화 한일회담(169)

    외무부는 이미 제어하기 힘든 상황으로 돌입한 북송 문제를 어떻게 하든 돌려보기 위해 한일회담 조기 재개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자니 연초 수석 대표직을 사임하고 유엔으로 귀임한 임병

    중앙일보

    1984.03.19 00:00

  • (3965)제80화 한일회담(164)-한일회담 재개건의

    나는 「다울링」 주한미대사와 유태하 주일대사, 그리고 국적으로부터 각기 들어온 정보와 정세를 분석한 결과 북송문제에 관한 정부의 단안이 빠르면 빠를수록 유리하고 질질 끌 경우에는

    중앙일보

    1984.03.13 00:00

  • (3962)제80화 한일회담(161)미, 일에 영향력 행사|김동조

    7월7일 제네바의 국적사무실에서 일적과 북적대표단은 북송협정조인을 전제로 만났다. 일본측은 원래 이날 협정에 조인키로 비밀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워싱턴과 동경에서 미국관리들이 일본

    중앙일보

    1984.03.09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958)|제80화 한일회담(157)북송저지대책 부심

    일적과 북적간의 북송교섭타결은 우리 정국에 일대 회오리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여야는 한편으로는 북송저지 운동에, 또 한편으로는 외교진용의 쇄신요구에 초당적으로 뭉쳤다. 일본이 2월1

    중앙일보

    1984.03.05 00:00

  • (3957)제80화 한일회담(156)

    일본언론들은 5월하순 제네바의 일적대표단 소환문제를 일본정부가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태하주일대사에게 좀 기다려달라고 요청했던「사와다」수석대표의 간청이 우리측을 기만하기위한

    중앙일보

    1984.03.03 00:00

  • (3947)-제80화 한일회담(146)

    최규하주일참사관 및 이범석한적청소년부장, 그리고 북송반대 전국위의 장택상·최규남·유진오대표는 이미 제네바에서 활동중이던 김용직주불공사와 합류해 「보아시에」위원장등 국적관계자들은 물

    중앙일보

    1984.02.21 00:00

  • (3923) 제80화 한일회담(122) 미대사의 고자세

    58년 9월11일 하오 나는 「다울링」주한미대사와 2시간여에 걸쳐 한일회담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다울리」대사도 「맥아더」2세 주일미대사와 비슷한 견해였는데 그에 앞서 50년대

    중앙일보

    1984.01.24 00:00

  • (3922) 제80화 한일회담(121) 친공계교포 가석방

    북송희망의 친공계교포 가석방문제로 한일회담은 재개된지 3개월만인 7월 하순부터 사실상 중단상태에 빠졌다. 정부는 그러나 8월초 가석방 절대반대 입장에서 일보 후퇴,「기시」수상의 어

    중앙일보

    1984.01.23 00:00

  • (3920) 제80화 한일회담(119)-유태화공사

    지난회에서 말한 조정환외무장관과 유태하주일공사간의 도발적 알력에 관해 행여 있을지도 모를 오해를 피하고자 몇마디 부연코자 한다. 나는 이미 고인이 된 두분을 포폄(포폄)키 위해 그

    중앙일보

    1984.01.20 00:00

  • (3912) - 제80화 한일회담(111) 4차회담 개막

    「기시」일본수상의 친서로 한결 누그러진 한일양측은 4월15일 제4차한일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나는 4월13일 임병직수석대표등 대표단에게 다시한번 우리측 입장과 일본측 주장을 상세

    중앙일보

    1984.01.11 00:00

  • (3910) 제80화 한일회담(109)-회담개최 연기

    정부는 58년2월26일 제4차 한일회담에 참석할 우리 대표단을 확정했다. 수석대표에 임병직 주 유엔대사, 대표에 김유택 주일대사·유태하 주일공사·장경근의원·이호씨(전 법무장관)·최

    중앙일보

    1984.01.09 00:00

  • 제80화 한일회담(104)|「후지야마」외상

    일본측은 대일강화조약상의 재산청구권 규정에 관한 미국측의 해석각서를 받고 이를 한껏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책동했다. 「후지야마」외상은 외무성내 강경파 관료들의 후원을 받아「기시」수상

    중앙일보

    1983.12.29 00:00

  • (3897)|제80화 한일금융

    「기시」일본정권의 발족은 3년여를 동결상태로 몰아 넣고있던 한일 회담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기시」수상은 취임 첫날 나를 통해 이박사에게 자신의 한일관계에 대한 소신을 피력

    중앙일보

    1983.12.20 00:00

  • (3896)|제80화 한일회담(95)|양국관계 개선위해 중개역할

    지난회에 공개한 나와 「기시」 수상의 극비면담에 대해 최근 일본에서도 이를 기록한 글이 한 학술논문에 발표됐다고 한다. 일본국제정치학회가 펴내는 학술기관지 『국제정치』제75호 (1

    중앙일보

    1983.12.19 00:00

  • 제80화 한일 회송(93)

    내가 미국에 체류해 있는 동안 본부에서는 조정환장관서리가 1년4개월간의 서리생활을 끝내고 56년12월31일 정식으로 장관에 임명됐다. 또 일본에서는 「하또야마」정권이 물려나고「이시

    중앙일보

    1983.12.16 00:00

  • (3860)제80화 한일회담(59)일본측 대표단|김동조

    당시는 「재개한일회담」이라고 불린 제3차 회담은 1O윌6일 상오11시5분 일본외무성 419호실에서 양국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우리측에서는 수석대표에 김용식주일공사, 대표에

    중앙일보

    1983.11.07 00:00

  • (3816) 제80화 한일회담 (15)|주일 대표부

    나와 임송본 조선식산은행총재가 51년7월20일 한일회담준비를 의한 자료수집차 동경에 도착해보니 비록 판자가건축이 드문드문한 거리이기는 하지만 쓰레기통을 엎어놓은 것 같은 부산에서

    중앙일보

    1983.09.14 00:00

  • (3804) 제80화 한일회담(3) 우리측 대표들

    이 연재를 쓰기위해 정부가 1965년에 발간한 「한일회담백서」를 보니 만13년8개월간 7차에 걸친 회담에 참여한 우리측 대표의 연인원은 나를 포함해 68명이었다. 자연인으로는 46

    중앙일보

    1983.08.31 00:00

  • (134)자유당 내각(27)

    이승만시대의 초기인사에선 건국초의 특이한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초대 임영신상공장관때 차관은 임문환씨였지만 발령이 나지 않았다. 당시 이대통령은 상공차관으로 다른 사람을 내정한 정

    중앙일보

    1983.03.23 00:00

  • 제 74화 한미외교 요람기(69)|험악한 정상회담 분위기|「아이크」가 한-일 정상회담 필요성을 강조하자|"일본과는 상종하지 않겠다" 이 대통령 퇴장

    「아이젠하워」대통령과의 2차 정상회담 직전에 서울에서 중립국 감시의원만의 공산측 대표단을 내쫓게 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치밀한 계획 하에 단행한 외교적 술수였다. 이 대통령은 틀

    중앙일보

    1981.09.01 00:00

  • (3058)|제72화 비관격의 떠돌이 인생 (56)|막혀버린 귀국길|김소운

    동경으로 들어오자 제일 먼저 나는 「후나다 교오지」씨 댁으로 갔다. 전 경성제대 교수이던 그분 댁이 내 연락 장소였다. 가족들에게서 온 편지며 신문 몇장이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

    중앙일보

    1981.03.11 00:00

  • 막 내린 「진산 시대」|백9일간의 투병도 보람없이|유진산 신민당 총재가 마지막 가던 날

    진산의 운명은 3시8분 신동준 비서실장에 의해 발표됐다. 이 발표가 방송에 의해 전해지자 보도진과 당 간부들이 병원 21층으로 몰려들었다. 당 간부들 가운데는 외출했다가 귀가 도

    중앙일보

    1974.04.29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