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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
삼전도는 서용 강동구 송파동의 지명이다. 그러나 그곳은「한국인에게 가장 부끄러운 곳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민족사상 처음 외적에 항복한 자리다. 삼전도의 치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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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이주-장호강
> 『일제의 토지수탈로 문전옥답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백성들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괴나리 봇짐을 싸고 무작정 만주로 떠났지요. 우리 가족은 독립운동을 하시던 아버님이 요시찰인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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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제자 : 초정 권창륜|홍천용씨
법관대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모르는 이는 없을 듯 하다. 하지만 l차 몽고난(1232년)때 불탄 대장경을 다시 각판한 사람이 누군지를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용득의-. 그는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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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청의 연혁|일제가 왕궁 가로막아 총독부로 건립|한때 국회·대통령집무실
중앙청-서울시 종로구 세종로1번지. 일제때는 식민통치의 본산인 조선총독부청사로 온국민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해방이후 지금까지는 관청의 상징으로 국민의 뇌리속에 못박힌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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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판」서『다산시선』출간|실학자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
조선후기실학자로 정치·경제·사회·군사·지리 등의 분야에서 방대한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은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산은 이 같은 저술 이외에도 많은 시를 남긴 시인이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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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큰 일」있을 땐 땀흘리는 사명당의 표충비|밀양군 무안면 무안리
나라의 길흉을 미리 점친다는 사명당 표충비-. 속칭「땀흘리는 비석」은 경남 밀양군 무안면 무안리 죽림이 올올한 진등산(해발 6백m)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영남누 마루꼬리가 고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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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5)제72화 비규격의 떠돌이 인생(33)|김소운|경리부 직원과 충돌
소설『홍염』의 작자인 서해도내 트집에 골탕을 먹은 피해자의 하나다. 속으로는 일상 미안한 생각이 있으면서도 일본인(경성일보)과 한 편집국에서 그네들의 우월 의식을 조석으로 겪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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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 정당 대통령 후보 방송대결의 막전막후
지난 2일부터 대통령후보를 낸 민정·민한·국민·민권등 4개 정당의 후보와연설원들이 TV와 「라디오」에 최소한 한차례씩 나가 국민들믈 상대로 지지를 호소했다. 10일에는 네 후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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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말을 가꾸고 다듬자|서정범(경희대·국어학교수)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시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어떠한 문자를 쓰고 있을까? 아울러 훈민정음이 없었다면「가시리」 등 고려의 노래가 전해졌을까. 나아가서 조선시대의 고조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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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로 끝난 「개화 지상주의」 민중속에서 추진력 못 찾아
한 시대의 문제의식은 연구경향을 좌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김옥균에 대한 재평가 및 연구자료 발간이 학계의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주로 정치학계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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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건립취지문』원본발견 진 태하 교수가 공개
19세기말(1896년) 독립문을 건립할 당시 백성들의 성금을 모으기 위해 돌린 독립협회륜고(취지문)와 보조금영수증이 발견됐다. 18일 진 태하 교수(명지대)에 의해 발견, 공개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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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연구에 「사각」이 많다
「다산」 연구에는 아직도 맹점과 사각이 수두룩이 남아 있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말기의 대학자요, 그에 관한 연구 또한 번다해서 많은 사람들이 「다산」을 논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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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면이란 무기|김정흠씨(고려대 교수·물리학)
1977년은 속된 말로 7땡의 해, 야구로 말하면 「러키·세븐」이 2중으로 겹친 운소좋은 해였다. 정치적으로는 새로 출범한 미국의 「카터」정부 및 일본의 「후꾸다」 내각과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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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
어느 양반집안에나 족보가 있다. 족보가 없으면 양반소리를 못 들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족보는 모두가 이조 때부터 시작된다. 족보란 유교의 영향을 받은 다음부터 생긴 것이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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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대 토론…우리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율곡 이이와 한국 사상의 맥락
국사상 수많은 위인과 명사들 가운데서 가장 우뚝한 세분으로 우리가 세종대왕·율곡 이이 선생·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꼽는다면 아마 한국 사람으로서는 별다른 이론이 없을 것이다. 이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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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사상과 민중의식|한국사 대 토론…우리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실학」이라는 말은 원래 특정된 개념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이든「허」에 대해서「실」을 강조하는 학문을 실학이라고 불러왔다. 송대 학자들이 불교에 대해서 성리학을 실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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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5)해외유학시절
서울 돈암동은 차차 번창하고 전차도 「버스」도 많이 다니게되었다. 학교도 점차 자리를잡아갔다. 그러나 국내정세는 날로 어두워 졌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점점 더 압력을 가하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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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년전의 감격 지금도 못잊어"
『누르면 누르는대로 묵묵히 참으며 살아오던 백성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압제자에게 반항의 맨주먹을 휘둘렀던 그날-. 필생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읍니다.』 「3·1운동」 당시 경성여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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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전국학련
브라운소장 면담 「스티코프」일행이 덕수궁으로 사라지자 군중은 다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나는 옆에있는 자전거 위에 올라가 즉석 연설을 했다. 나는 「결사반탁」「결사반탁」을 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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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8)제47화 전국학련(70)
식장에서 밀려나오는 학생들과 경찰이 서로 뒤섞이면서 자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나는 즉시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는 장택상청장과 담판을 벌여 안국동 학련본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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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1398) |전국학련 -나의 학생운동 이철승
장행회가 끝나자 본관 앞 운동장에 나온 우리들은 장작으로 모닥블을 피워놓고 마지막축배(?)를 올렸다. 불 옆엔 자전거에 실려온 흰막걸리가 수십통 쌓여있고, 그 옆에서는 인촌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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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현대
『법령에 의해 지도하고, 형벌에 의해 규제하면 백성들은 형벌만 면하려고 무슨 짓을 하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덕에 의해 지도하고 예에 의해 규제하면 도덕적 수치심을 갖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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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전기의 언론제도-서울대 동아문화연 학술강좌
이조 전기의 왕정이 후기보다 비교적 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언관들의 강직한 언론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언론은 왕권의 언론탄압으로 일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문고나 유생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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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대왕 비문
어쩌면 한·중·일 3국학자들이 광개토대왕 비를 조사하기 위해 중공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다. 광개토대왕 비가 이처럼 중요시되는데는 까닭이 있다. 이 비문이 유명해진 것은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