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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제자 : 초정 권창륜|홍천용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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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법관대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모르는 이는 없을 듯 하다. 하지만 l차 몽고난(1232년)때 불탄 대장경을 다시 각판한 사람이 누군지를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용득의-. 그는 고려 때 문하시중(국무총리급)으로 고종28년에서 원종12년에 이르기까지 장장 30년을 최고행정관으로 지내면서 몽고의 2차 침입 와중에서 불력으로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불사를 지휘, 오늘의 국보를 남긴 장본인이다.
그러고 보면 귀성인 용씨는 이 나라 불교문화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성씨다.
용득의는 오늘날 l만여 홍천룡씨들의 시조가 된다. 본관은 홍천의에도 광천·양근(오늘의 양평)·청주·용인 등 20여본이 전하나 모두가 홍천룡씨에서 갈린 세 가지로 사실상 단일본인 셈이다.
「용」자가 성으로 쓰이게 된데 대한 연원에 대해서는 그 자손들은 아직 역사적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다만 상고시대의 부족사회가 부족명칭을 동물의 이름을 떠 불렀다는데서 짐작할뿐이다.
농경을 담당하는 부족은 「우」, 부족의 안전을 보호·경비하는 쪽은 「마」, 그리고 북쪽을 총괄해서 다스리는 편은 동물중 가장 힘이 센 호랑이의 「호」라 했던 것을 사람들이 호랑이를 두려워한다 하여 상징적 동물인 「용」자로 바꾸어 썻다는 구전이다.

<고려·조선 장군13명>
시조 득의공은 고려조의 원로 정치가로서 그 위세가 당당했으나 만년엔 벼슬을 내놓고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장항리 향리에 내려가 불전전수와 불교전파에 힘을 쏟았다.
그가 고향의 금학산 기슭에 이룩한 절 용수사와 불도들의 수련도장인 학서루는 지금은 그 모습을 볼 수 없고 언제 폐허가 됐는지 알 길 없지만 7백여년이 흐른 오늘도 흙에 묻힌 와편은 이곳이 옛 절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다만 용수사와 학서루 창건 당시 득의공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돌배나무 등 3그루의 노거수가 생명을 부지, 산초 속에 우뚝 솟아 옛터를 찾는 이의 발길을 맞는다.
시상공에서 찬란하게 가계를 연 용씨는 귀성임에도 고려·이조를 통해 정승1, 관서7, 부원군l, 장군13명 등 문무를 갖춘 짭짤한 명문으로 성장했다.
문효공 용포수는 학문파 용기·지략을 두루 겸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30년 동안을 보좌, 이씨 조선 개국과 동시에 개국공신으로 공조·비조관서를 역임했다.
그의 아들 만헌 천기 역시 개국공신으로 정종 때에 공조판서에 올라 부자가 2대에 걸쳐 판서를 지냈다.
이들 부자는 그후 5백년이 넘게 지난 1922년 유림의 천거로 성균관으로부터 포상이 내려지고 그해 8월 서울 옥수동에 포진 정몽주, 율곡 이이, 퇴계 이황, 송시열 등과 함께 유림공부자 오륜행실적 도통비가 세워져 현재에 이른다.
또 12세손 철주공은 갑산부사, 아들 유양은 영흥부사, 손자 맹손운 이순신 장군에 앞서 전나좌수사를 지내는 등 누대에 걸쳐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역사의 흐름은 숱한 가문들에 명멸의 기록을 남겨주지만 용씨 가문은 엉뚱하게도 성씨의 오해에서 멸문의 화를 입게된다.
병자호란 때 청의 장수 용골대로 본 피해가 바로 그것이다.
이 나라 조정에 국치를 안겨주고 수많은 백성들에게 피해를 준 바로 그 용골대가 용씨와 한 핏줄의 자손이란 엉뚱한 오해가 생겨난 것이다.
그로 인해 용씨 일족은 일시에 폐문을 하고 변 성명 또는 은둔생활로 세상과는 등을 지다시피 역사의 그늘 속으로 숨어들었다.
용골대의 후유증은 무서울 정도였다. 병자호란 후 조정에서는 용씨가 벼슬길에 나서는 것을 막기 위해 「용」의 글자 획 「입」 「월」 「복」 「사」「삼」 다섯자 중 「복」자를 빼고 쓰도록까지 명을 내렸다.
즉 「복」자는 점「복」이 아닌 용의 비늘을 뜻한다 하여 비늘이 없으면 날지(등용)못할 것이니 『용비어천가』와 용상(임금이 앉는 좌석)의 두낱말 외에는 모든 용자에 「복」자를 빼도록 했던 것이다.

<용자서 「복」을 빼>
이때부터 용씨들은 나라의 명대로 「복」획을 뺀 「용」으로 써오다 최근 고증을 거쳐 불과 6년전 「복」자 획을 되찾아 「용」으로 고쳐쓰게 되었다는게 대종회장 용이식씨의 말이다. 역사 속의 희극같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뒤에 용골대는 용씨가 아닌 조선사람인 한골대로 병자호란 때 함께 침입했던 청장수 마부대와 한 형제간으로 밝혀진다. 그의 아버지 한광윤은 전주읍의 아전을 지낸 인물로 공금 7천관을 횡령한 뒤 이성태란 가명을 쓰고 함경도에 숨어살다가 붙들려 참수당했다. 이들 형제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인조4년 명나라로 건너갔다가 그곳에서 형 한골대는 고관인 용문오의 수양아들로, 동생 한부대는 역시 명조고관인 마창순의 수양아들로 들어가 후에 청의 장수가 되어 조선침략에 앞장선 것이다.
이후 용씨는 다시 양지로 나오게 되고 오해로 인해 나빴던 인상이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차차 사라지지만 용의 비늘을 잘렸음인지 조선조가 끝날 때까지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없다.
근세 인물로는 항일투쟁을 한 독립유공자 용환각씨가 있다.
그는 춘천고보 시절부터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재학시절 민족주의 비밀결사 조직인 상연회를 조직, 학생들과 농민들을 상대로 민족사상을 일깨우는 등 일제 항거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렀다.
현존 인물로는 재계에서 용이식씨(59·한국화공공업주식회사·동진금속주식회사 대표이사)와 한국무역대리점 협회장 용을식씨(47·KD인터내셔널상사사장)등이 있고 법조계에는 용태영 변호사(53)와 용남진 변호사(56)가 활약하고 있다.
용태영 변호사는 석가탄일을 공휴일로 만든 장본인.

<시조 유허비 건립>
용 변호사는 지난 73년3월24일 국가를 상대로 「석가탄일 공휴권 확인 등」의 청구소송을 서울고법특별부에 제기,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지난 75년1월일 야간국무회의에서 석가탄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고 어린이날도 이때 함께 공휴일로 지정됐다.
또 학계에는 용재탄(숙대대학원장·약학박사)·용세중(아주공대교수·경영학박사)·용문식(서울대교수)·용석인(관동대교수)·용석인(한양대교수)·용환선(대림공전교수)·용환승(인하공대교수)씨 등이 있다.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은 용씨 가문의 사위. 부인은 29세손인 용영환씨의 둘째딸 용인순씨.
병자호란 이후 거의 위문의 길을 걸어 왔던 용씨들은 영화의 시대를 다시 열기 위해 문중을 재정비하고 지난 78년8월15일에는 선조들의 혼과 백이 깃든 강원도 홍천군 동면 덕치리 수타사 입구 비봉에 7천여 만원을 들여 시조 유허비와 제각 등을 세우고 매년 음력3월 삼짇날 전 문중이 모여 향기를 받든다. <글 임수홍 기자 사진 최재영>

<지명인사>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인사는 다음과 같다. (종친회 제공)
▲용영대(전 조흥은행 검사역) ▲용영창(국민관광부 계획과장) ▲용영홍(서울상도l동장) ▲용영식(태화고무 총판매장사장) ▲용봉식(전 해성사이다사장) ▲용세창(치안본부근무·경감) ▲용환태(한진임업이사·신한목재상사부사장) ▲용환복(양평 국수중교사) ▲용환태(법무부 인천사무소과장) ▲용주성(전 경찰경감) ▲용군호(국립보건원 안전성부장·약학박사) ▲용상욱(동진금속상무이사) ▲용철상(한일 석유사장) ▲용석중(국가안전기획부) ▲용운중(동신철강사장) ▲용현중(이수화학이사) ▲용한중(서울청량리사장대표이사) ▲용범중(홍천읍장) ▲용호중(궁술인) ▲용형중(제일은행 서울 종로지점대리) ▲용덕중(강원도 동해시 금성대리점 사장) ▲용유수(유니온스튜디오사장) ▲용화중(교학상사 사장) ▲용호찬(철도공무원 훈련과장) ▲용호석(치과병원장) ▲용영일(육군준장)▲용환식(춘천서수사과) ▲용항중(양구군 보건소장) ▲용재정(국민당 사무총장 비서실장) ▲용석준(중앙종친회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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