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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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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삼전도는 서용 강동구 송파동의 지명이다. 그러나 그곳은「한국인에게 가장 부끄러운 곳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민족사상 처음 외적에 항복한 자리다.
삼전도의 치욕은 민족사의 오점이다.
l637년 병자호란 때 조선왕인조는 남색 양복을 입고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엄동의 얼어붙은 땅바닥에 꿇어앉아 청태종에게 항복했다.
그때가 정축년 정월삼십일 아침. 얼어붙은 산성의 돌계단을 인조대왕은 말한 필 없이 엎어지고 미끄러지면서 거의 무릎으로 기다시피 하여 내려갔다. 이를 바라보던 신하들과 백성들의 통곡소리는 하늘과 땅에 사무쳤다.
삼전도 수강단 위에 앉은 청태종은 그 밑에 꿇어앉은 인조와 왕세자 소현세자의 강예를 받았다.
이 항복으로 두 나라의 화약이 맺어지고 소현, 봉림 두 왕자가 인질로 잡혀갔다. 척화파의 강경론자 홍익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가 잡혀가 참형을 망하고 그 뒤에 김상헌도 잡혀가 옥고를 겪었다.
그러고 나서 세워진 것이「대청황제공덕비」. 이른바「삼전도비」다. 청의 강요로 인조17년 겨울에 세워졌다. 우리를 쳐 이토록 은혜를 베푸시니 얼마나 고마운 줄 모르겠다는 뜻의 내용이 이경석의 글로 씌어 있다.
높이 3·95m, 폭 l·4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비다. 비면의 왼쪽은 몽어, 오른쪽엔 만문, 뒷면엔 액자로 되어 있다.「한글」이 끼지 못한 때이니 그때의 민족주체 의식의 소재를 알만도 하다.
그 비는 한때 땅에 매몰 된 적도 있다. 고종32년(1895년) 청일전쟁 후 유의 위세가 꺾인 때였다.
다시 세워진 비석은 작년 문교부가 민족의 수치라고 쓰러뜨렸던 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비는 사적 1백1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부끄러웠던 과거도 역사의 진실인 바에야 그것을 보기 싫다고 없앤다고「사실」자체가 없어질 리가 없다.
오히려 삼전도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 당당하고 적극적인 태도다. 교육적 의미에서도 그렇다.
서울시가 삼전도 주변을 사적공단으로 조성해서 청소년들에게. 국가, 민족관을 심는 산 교육장으로 삼으려는 것은 오랜만에 좋은 착상이다.
일군이 20만명의 인명을 살상한 남경대학살의 현장을 공원으로 조성해서 국민들에게「망각의 병」을 경계하고 있는 중공의 예도 있다.
삼전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곳의 치욕도 모르는 국민은 지금수도 없이 많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런 시대에 우리의 행복이 민족사의 치욕 위에 서있음을 가르치는 것은 아주 절실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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