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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5)<제50화>해외유학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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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울 돈암동은 차차 번창하고 전차도 「버스」도 많이 다니게되었다. 학교도 점차 자리를잡아갔다.
그러나 국내정세는 날로 어두워 졌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점점 더 압력을 가하여왔다. 주객이 전도되어 일본사람은 안댁 어른이 되고 한국사람은 안채를 내주고 행랑방에 거주하는 셈이 되었다. 일본인은 소위 내지인, 한국인은 선인(조선인의 약칭)으로 내선일체가 되었다 하고 학교에서는 물론 가정에서 조차도 일본말을 쓰라고 강요하였다.
말은 그 민족의 얼이어늘 이를 강제적인 탄압으로 강탈하려한 일인들의 야만성이야 새삼 일러 무엇하랴. 거개의 한국인들은 직장이나 학교에서 일본말을 배우고 쓰더라도 집에 돌아가면 한국말을 쓴다. 이를 법이나 제도로 탄압하려하였으니 어리석은 짓이라고 할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칼과 총을 쥔자 앞에 손발이 묶여있는 형국인 우리 백성들은 억울한대로 복종할 수 밖에 없었다. 학교에 견학관이 나타나면 그들은 먼저 일본말을 잘 사용하는가 아닌가를 조사하였다.
또 무슨 식전때면 시학관은 손님과함께 뒷줄에 숨어 앉아 말(언어) 조사관 노릇을 하였다. 식이끝나면 으례 몇학년 몇반 누구누구가 할국말을 썼다고 책임추궁을 하고 전말서를 받아갔다.
이러한 일본의 최후 발악적인 횡포는 한국인믈의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럴수륵 나는 남의나라에 떨어지지 않도륵 묵묵히 가르치는길밖에 승리의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우리문학계승의 일익이나마 담당하고자 노력하였다.
하루는 창씨를 하여야 한다는 명령이 내렸다.
우리나라는 부모님께로부터 받은 성은 비록 여자가 시집을 가서 남의 식구가 되고도 그대로지니는 법도인데 성을 갈라는 트집은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먼저 학교교사들로 하여금 시범을 보이게 하여 성을 갈고 호적을 고치라하였다. 할수 없이 이씨는 이가 백천 조씨면 본을 따서 백천으로 성을 삼기도 하였다. 나는 마침내 집의 호주가 영국유학중이라서 『지금 호주가 없어서 고치지를 못하겠다』고 이유서를 써 내었다. 그후 다시말이 없어서 변성명을 아니하고 그럭저럭 넘어가게되었다.
교육은 점점 이상스러워졌다.
「미나미」(남) 총독은 세가지 교육방침을 제시하였다. 국체명징, 내선일체, 인고단련등 참기어려운 일을 시켰다. 나는 이말을 지금 다시 쓰는것조차 싫고괴롭다. 지금도 이토륵 괴로우니 당시의 우리 한국민족이 받은 수모와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를 저들은 짐작이나 할까. 1937년부터 해방이 된 1945년까지 교육은 파멸기였다고 할수 있다. 집집마다 유일한 식기인 놋그릇마저 공출, 나의 친가는 다락깊이 간수한 제기만은 공출하지않았던 정성이 되살아 기억난다.
여학교에 배당된 작업이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운모(mica·광물)를 얇게 저미는 일을 시켰다. 면도칼 같은 것으로 결을 따라서 벗겨냈다. 또북어를 껍질을 벗겨 머리를 파내고 내장을 꺼내어 넓적하게 만드는 작업도 하였다. 방화연습도 시켰다. 양동이에 물을길어 「릴레이」식으로 날랐다.
장대끝에 짚이나 새끼줄을달아 불을 끄게도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미군의 B-29는 우리의 상공까지 날아들어오고 은빛 날개가 구름속에 번쩍이기까지 하였다. 대공포를 쏘았으나 포성은 하늘 중간에서 하얀 연기를 뿜으며 사라지고말았다.
이런 꼴을 보며 새끼줄로 불끄기란 아이들 장난이 아닌가. 일본도 틀렸구나 하는 짐작이갔으나 입밖에 낼수는없었다.
신문 보도도 없고 외국방송도 들리지 않으니 진상을 알수가 없었고 우리는 무시무시한 전시 분위기 속에서 웃음잃은 묵묵부답의 얼굴로 강제 작업에 임하였다. 뿐만이 아니라 숭전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고 전 학생들을 동원하여 소위 압궁에 참배를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숭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전세는 불리해지는듯 1943, 4년쯤에는 시골로 소개를 가라고 권장하였다.
식량은 배급제로 되고 사람들은 시골로 다니면서 식량을 구하여 허리에 차고 들어오는지경이었다.
1945년 여름방학이 왔다. 나는 그제서야 하동 아버님께로 피난겸 간것이 그곳에서 8월15일 감격의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유학시절의 이야기를 쓰라는 청탁이었는데 별 이야기거리도없고 또 기억도 희미하여 학교시절의 몇가지 생각나는 일과 첫 교직에 임하여 해방이 되기까지의 일을 단편적으로 써보았다. <끝>
※다음은 원로 아동문학가인 윤석중씨의 아동문학에 관한 글을 싣게 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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