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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장제스와 천제루의 만남, 그리고 이별
▲1924년 황포군관학교 교장 시절의 장제스(왼쪽)와 천제루. [김명호 제공] 1927년 8월 21세의 천제루(陳潔如)는 장제스(蔣介石)가 권하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 “정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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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현대판 여불위
▲천태산(天台山) 고찰을 방문한 장징장(가운데). 시기는 1936년 인광을 만난 후로 추정된다. 김명호 제공 장징장(張靜江)의 행적은 여불위(呂不韋)를 연상케 한다. 세상이 뒤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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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건설로 ‘황금 10년’ 연출 … 마오쩌둥도 평가
천태산(天台山)고찰을 방문한 장징장(가운데). 시기는 1936년 인광을 만난 후로 추정된다. 장징장(張靜江)의 행적은 여불위(呂不韋)를 연상케 한다. 세상이 뒤죽박죽이던 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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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없는 혁명은 정치 불량배들이 하는 짓”
장징장은 한쪽 다리가 불편했지만 산에 오르기를 좋아했다. 교자를 타고 저장성 모간산(莫干山)에 오른 장징장. 김명호 제공 ‘강남제일가(江南第一家)’는 열 손가락을 다 동원해도 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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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서남연합대학 戰時에 8년간 문 연 중국 최고 학부
서남연합대학 보행단이 행군하는 모습. [김명호 제공] 1937년 7월 베이징 교외에서 중·일 무력충돌이 벌어졌다. 중국 국민정부는 일본에 전면전을 선포했다. 그러나 중국 대학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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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기지’ 황포군관학교의 탄생
1924년 6월 16일 황포군관학교 1기생 입학식에 참석한 쑨원(가운데). 오른쪽에 군복을 입고 차렷 자세로 서있는 이가 교장 장제스. [김명호 제공] 황포군관학교는 소련 홍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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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와 천제루의 만남, 그리고 이별
1924년 황포군관학교 교장 시절의 장제스(왼쪽)와 천제루. [김명호 제공] 1927년 8월 21세의 천제루(陳潔如)는 장제스(蔣介石)가 권하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 “정권을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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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박정희 시대] 13.경제 제일주의 "가난 추방은 천명"
민간인이면서 '5.16 혁명주체세력' 으로 통하는 김용태 (金龍泰.72.전의원) 씨는 박정희 (朴正熙) 전대통령의 오랜 술친구였다. 그는 김종필 (金鍾泌.JP) 자민련총재의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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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가황조' - 쑹아이링등 송씨 세 자매의 삶으로 본 중국현대사
어둠속에서 자막이 차례로 오른다.'돈을 사랑한 여자 쑹아이링(宋靄齡),중국을 사랑한 여자 쑹칭링(宋慶齡),권력을 사랑한 여자 쑹메이링(宋美齡).' 목사이자 출판거부였던 쑹야오루(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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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덩샤오핑.장징궈 닮은꼴-홍콩 시사주간지 중국時報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대만의 장징궈(蔣經國)전총통은 서로 닮은꼴이란 분석이 나왔다. 홍콩 시사주간지 중국시보(中國時報)는 최신호에서 「덩샤오핑 평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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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사회주의系독립운동가 金山 上.
광복 50돌을 맞이해 정부수립후 최대규모인 1천4백42명이 새로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다.이중에는 이데올로기 문제로 그동안 포상에서 제외됐던 이동휘(李東輝)선생등 사회주의계열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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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비운의 혁명가:상(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3)
◎팔로군서 활동하며 「조선해방」준비/대장정 참여해 포병장교로 용맹떨쳐/45년말 조선의용군 간부들과 평양에 해방 북조선에는 두명의 장군에 관한 전설이 풍미했다. 그 한사람이 항일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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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76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백남운 「독립동맹」위원장에/서울 조선공산당은 철저히 따돌림 당해 46년 1월께 서울에 와서 암약하고 있던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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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 지식인의 고뇌|민두기
지난달에 뜻밖에 한 일본인연구자로부터 국제전화로 내가 여러해 전에 한글로 써서 발표한 채원배에 관한 논문을 일역하여 발표하고 싶다는 전갈이 왔다. 동의했더니 이윽고 중국연구 학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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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서 광복절 43주 맞는 마지막 의열 단원 김승곤 옹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어도 중국에서의 항일 투쟁 당시를 회고하면 바로 엊그제 일 같아요』 55년 전인 지난 33년5월8일 전남 목포를 떠나 독립 투사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18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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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공이냐 임정이냐-미서「정통성」부인…정부수립 "물거품"
해방정국에서의 정치논쟁은 이른바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선포와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요인의 귀국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왜냐하면 이들이 객관적인 정세를 떠나 하나의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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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36년(28)-의열단(4)
의열단의 중요한 과녁의 하나는 밀정이었다. 3 1운동 이후 만주 등 해외를 기지로 하는무장항쟁이 강화되자 일제는 밀정을 대량으로 양성, 투입했다. 그들 밀정 중에는 일본 관헌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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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영초
중공의 전인대에서 주은내의 미망인 등영초가 국가주석에 선출되리라는 외신이 있었다. 등영초는 지금까지는 전인대 상무위 부위원장. 그러나 그녀의 대일 투쟁경력이나 공산당 참여 기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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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7)제79화 육사졸업생들(20)|장창국|광복군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은 뒤 광복군이 창설된 것은 1940년 9월17일이었다. 그러나 편제만 갖추어졌을 뿐 실제의 부대는 없었다. 외국 땅에서, 그것도 정권이 안정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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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당)창당-건국 60년의 파노라마|소수지하단체가「10억」위에 군림하기까지
60년 전 오늘 당국의 눈올 피해 상해의 한 비밀장소에서 12명의 대표가 모여 창설했던 중공당은 10억의 인구를 다스리는 주역으로 성장했다. 당시 50여명에 지나지 않았던 불법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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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주석 송경령
중병으로 누워있는 손문 미망인 송경령이 중공의 명예국가주석에 임명됐다고 외신은 전한다. 지난49년 국민당 정부의 대당패주와 중공정권의 수립을 계기로 송경령은 국가부주석직에 「앉혀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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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의 인간과 문학 (하)
그가 두 차례 중국에 갔던 것은 1927년. 당시 광동에서 그는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보다 더욱 혁명적인 모험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광동 국민당 우파 조직 장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