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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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전두환 대통령도 적어도 5공 초반에는 이런 면에서 생각이 일치했어요. 이철희·장영자 사건의 여파로 당신의 처삼촌(이규광씨)를 구속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도 「처삼촌 무덤에는 벌초를 안 한다는 말도 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혐의가 있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벌하라」고 오히려 격려했던 것으로 들었습니다.』
또 다른 핵심인사 Q씨는 『정권초기의 5공 청와대는 재계에 대해 빗장을 단단히 잠그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로열 패밀리」와 갈등>
『부패라는 게 마치 바이러스 같아 한번 감염되면 정신없이 퍼지는 것 아닙니까. 당시 나도 정주영씨 같은 재계사람들을 자주 만났지만 「거래관계」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순수했었다고 자부합니다. 당시 많은 이들이 우리(5공 주도세력)의 정치자금은 도대체 어디서 조달되는지를 예민하게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국민들에게 이 점부터 명확히 납득시켜 놓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느꼈어요. 청와대가 확실하게 빗장을 걸어놓고 있으니까 기업인들이 더 불안하게 여겨졌던지 전대통령의 몇몇 친인척을 창구 삼아 접근하는 눈치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나중에 5공 비리사례로 거론됐던 새 세대육영회였지요. 두 허씨(허화평·허삼수)는 이 단체 살림을 처음부터 발벗고 나서서 방대했습니다. 「대통령 부인이 사회단체를 운영하는 것은 좋지 않다. 박대통령 때의 새 마음 봉사단을 지산 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이왕 사회활동을 하려한다면 차라리 새싹회 같은 단체를 간접적으로 지원해 주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새 세대육영회가 창립총회를 2∼3일 앞두고 있을 무렵 예정된 회원명단을 보니 대부분 대기업총수의 부인들이었어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더구나
11대 국회의원선거(81년3월25일)를 앞두고 있던 시기여서 서슬 퍼럴 정도로 돈 안 드는 선거, 깨끗한 선거가 강조되고 있었어요. 물꼬는 한번 터지며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양 허씨가 중심이 되어 육영회의 창립총회를 선거 후로 연기시킨 것으로 압니다. 이 때문에 허화평 청와대 보좌관은 이순자 여사에게 불려가 단단히 꾸중을 들었다고 해요. 「당신이 작용해서 총회를 연기시긴 것 아니냐. 그럴 수 있느냐. 나도 명색이 대통령부인인데 그래도 체면은 생각해 주어야 할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이 당시 양 허씨는 J·K씨 등 전대통령의 친인척이 11대 총선에 출마하려고 나선 것을 저지하기도 했습니다. 정권출범 후 개혁주도세력과 이른바 「로열 패밀리」와의 갈등이 이때부터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겁니다. 81년말(12월22일자) 허화평 보좌관이 정무1수석으로 발령나 청와대본관에서 별관(비서동)으로 이동한 일도 이 갈등이 주된 배경이라고 생각하면 맞을 겁니다.』
청와대의 기류가 이처럼 가파르게 움직이고 있었던 만큼 일반사회에 대한 이른바 「개혁」의 칼날은 매섭기 싹이 없었다. 이미 공무원 숙정·삼청교육대·언론통폐합 등의 초법적 조치로 인해 신 군부에 대한 외포 감은 충분히 형성돼 있었다.
개혁의 중심에는 역시 양 허씨가 있었다. 특히 허삼수 사정수석이 주도한 「사정협의회」(80년10월10일 발족) 는 5공 주도세력이 나름대로 의욕을 담아 출범시긴 기구였다.

<각 기관 「청렴도」작성>
청와대사정비서관을 지낸 A씨의 회고.
『이른바 「기획사정」이라는 개념은 5공들어 생겼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때도 사정관계장관회의가 있었고 수시로 암행감사반이 운용됐지만 일관된 기준아래 움직인 게 아니어서 임시변통의 성격이 강했어요. 사회적 물의가 일거나 대통령의 특명이 떨어지면 활동한다는 식이었지요. 그러나 80년 사정협의회가 국가 최고의 사정기구로 발족하면서부터 사안별 수사업무보다는 장기적인 기획을 세워 일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개혁은 철저히 구조적·제도적이어야 한다」는 허씨들 의지론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겠지요. 이것이 5공 후반, 나아가 6공에 와서는 도로아미타불이 돼버린 느낌이지만 당시에는 수년 내에 해묵은 사회풍토를 바꾸어보겠다는 의욕이 왕성했어요. 실제로 사회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A씨는 그러나 「청렴도 측정」 발상이나 「의식개혁 9개 덕목」등에서 볼 수 있듯이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구호가 남발된 면, 특히 5공의 사정작업이 자발적이기보다 국민일방의 정권에 대한 공포감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한계를 인정했다. 그의 계속되는 증언.
『허삼수 수석은 세상에서는 잘못 일고 있는지 몰라도 아주 청렴한 인물이었어요. 함께 일하던 80년에 그는 동부이촌동 16평짜리 군인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막강하다는 보안사대령이 말입니다. 사실 신 군부의 영관급들은 너무 단순하다 싶을 정도로 사명감하나는 대단했고 갖고 있는 기득권도 없었기에 개혁이니 혁명이니 하며 물불 안 가리고 자신있게 엄청난 일들을 해치웠던 면도 있어요. 그 덕에 평시 같으면 아무도 내지 못한 성과를 올린 것이 많지 않습니까. 전두환 대통령도 부하의 직언은 선뜻 소화할 줄 아는 편이었습니다. 80년에만 해도 우리가 대통령 면전에서 「정부의 정통성에 대해 회의적인 여론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걸 불식하려면 선거부터 깨끗하고 공명해야 한다. 또 대만으로 쫓겨간 장개석 총통이 부정부패를 청산하기 위해 자기 며느리를 처형했던 일화도 잘 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감히 발언할 수 있던 분위기였습니다. 결국 사장되고 말았지만 「청렴도」라는 것은 허수석의 발상이었는데, 원래 「청빈도」로 하려던 것을 주변에서 「빈」자가 어색하다고 해 수정한 용어였습니다. 그러나 사회 각계의 청렴한 정도를 일목요연하게 표시한다는 자체가 어찌 보면 군대식 발상 이였지요. 그 청렴지수 측정모델을 개발하느라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한때는 정부 각 기관의 기구표를 놓고 청렴 정도에 따라 빨간색·파란색 등 색깔을 칠해 보기도 했지요. 허삼수 수석 때 측정모델은 완성되지 못했어요. 후임 정관용 수석이 오고 나서 비로소 만들어졌지만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채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정치적 판단이 좌우>
개혁주도세력은 사정협의회를 통해 공직사회를 비롯한 사회전방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일방으로 특별치 몇몇 「시범케이스」를 선정, 본때를 보임으로써 충격요법의 효과를 노린 듯하다.
5공 초기의 청와대비서관 출신 B씨는 『박세직 수경사령관의 보직해임·예편 조치나 세칭 「돗자리파동」, 나아가 이규광씨의 구속 같은 일이 따지고 보면 모두 한 범주로 묶을 수 있는 사건들』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거점 폭격』 같은 일 아니겠습니까. 야전에서 높은 고지 하나를 점령하면 주변일대는 모두 평정되는 것과 같은 원리겠지요. 사건 당사자들의 잘잘못 여부를 떠나 이런 사건들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판단이 관건이었어요. 권력층간의 파워게임 측면도 숨어 있고요. 박세직 소장(육사 12기·현 민자당의원)이 전격적으로 예편된 사건(81년8월)은 군 상층부 전체를 겨냥한 조치였습니다. 여기에 「힘의 논리」라는 플러스 알파요인도 있겠지요.
어쨌든 그 사건으로 신 군부 출범이후 민간사회를 향해 갑자기 활발해졌던 군부의 각종 「손길」은 신기할 정도로 뚝 끊기더군요.
최고 통치자의 재가가 있기에 이런 엄청난 일들이 가능한 것이었지만, 내가 알기로 적어도 박 장군의 군복을 벗기는 일은 전대통령이 먼저 결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관급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었어요 그만큼 5공 초기 킹 메이커들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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