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오, 펑더화이에게 “미 10군단 장진호로 유인, 전멸시켜라”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베이징시 부녀 4만여 명이 참석한 항미원조 지지대회. 마오쩌둥 좌우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1951년 1월
-
“국가원수급만 330명 인터뷰 … 직업외교관도 혀 내두르죠”
‘식인종 부락에 떨어뜨려 놔도 추장이 되어 돌아올 놈’. 흔히 수완 좋은 친구를 일컬을 때 종종 등장하는 비유다. 물론 이때 쓰는 ‘놈’자는 욕이 아니라 기막힐 정도란 뜻의 영탄
-
[사람 사람] 이동원 동원대 이사장 자서전 펴내
"마릴린 먼로를 데려오게. " 1950년대 초반 임병직(林炳稷)유엔대사는 미국 컬럼비아대 유학생이던 이동원(李東元)씨에게 넌즈시 '밀명' 을 내렸다. 한국대표부 주최로 치를 예정인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32)
32. 林炳稷대사의 부탁 나는 1952년 켄트주립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을 타진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귀가 닳도록 옥스퍼드 얘기를 들은 데다
-
유엔대사 유엔가입으로 당당해진 「외교첨병」|유엔대사
남북한의 유엔가입이 실현되면서 유엔외교의 실무주역인 유엔대사가 여론의 주목을 끌고 있다. 지난날 한국외교가 유엔 표 대결에 집중됐을 때는 그 현장 지휘자였으며, 앞으로는 유엔무대에
-
(88)|프란체스카 여사 비망록 33년만에 공개
1월11일. 「무초」 대사가 와서 대통령이 「리지웨이」장군을 만나는 것을 주선하기 위해 비행기로 대구에 가겠다고 말했다. 의전상 주재대사는 그와 같은 회담을 채비하도록 되어있다.
-
(3912) - 제80화 한일회담(111) 4차회담 개막
「기시」일본수상의 친서로 한결 누그러진 한일양측은 4월15일 제4차한일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나는 4월13일 임병직수석대표등 대표단에게 다시한번 우리측 입장과 일본측 주장을 상세
-
(3910) 제80화 한일회담(109)-회담개최 연기
정부는 58년2월26일 제4차 한일회담에 참석할 우리 대표단을 확정했다. 수석대표에 임병직 주 유엔대사, 대표에 김유택 주일대사·유태하 주일공사·장경근의원·이호씨(전 법무장관)·최
-
(3909) 제80화 한일회담(108)-억류자 상호석방
「구보따」망언으로 결렬된 한일회담이 결렬된지 4년반 만에 열릴 제4차 회당준비를 위해 우리는 58년 정초를 바쁘게 보냈다. 우리측 대표단의 구성문제는 이대통령의 의중에 달려 있었지
-
(3804) 제80화 한일회담(3) 우리측 대표들
이 연재를 쓰기위해 정부가 1965년에 발간한 「한일회담백서」를 보니 만13년8개월간 7차에 걸친 회담에 참여한 우리측 대표의 연인원은 나를 포함해 68명이었다. 자연인으로는 46
-
6·25와 이승만 대통령|프란체스카여사 비망록 33년만에 공개
참으로 얼마만에 찾아온 내집인지…. 나는 환도하자 이화장이 궁금해서 곧 와보고 싶었지만 너무도 바쁜데다 이화장에도 시체가 여러구 버려져있다는 이야기였고 또 지롸같은 것을제거한 뒤
-
6·25와 이승만 대통령|프란체스카여사 비망록 33년만에 공개
계속 북진하고 있는 우리 애들은 사기충천하여 동해안쪽에서 우렁찬 노래를 부르며 급진중이라고 신성모 국방장관이 보고해왔다. 적의 저항은 별로 없었다고 했다. 지금 우리국군 2개사단의
-
(3217)제74화 한미 외교문화요람기(84)
양유찬 대사와 내가 워싱턴에서 하도 일본을 비난하고 다녔더니 정년초 「델레스」 국무장관은 양 대사를 세 차례나 불러 일본을 너무 욕하지 말라고 귄유했다. 「덜레스」의 충고에도 꺾이
-
제74화 한미 외교 요람기|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재한 일 재산권: 포기조약 찬 약에 명시|연합국 일원으로 참석은 실현 안돼|옵서버 자격으로 임병직 대사 등 3명을 파견
정부는 미국의 대일 평화조약 초안과 관련한 대미각서를 보낸 것과 비슷한 시기인 51년7월20일, 유진오 고려대 총장과 임송본 조선식산 은행총재를 일본에 보내 한일회담에 관한 사전조
-
제74화 한미외교 요람기|이대통령 방미
이승만 대통령의 방미는 나의 주미대사관 시절을 통틀어 가장 감격적이고 희열에 찬 행사였다. 방미를 전후해 이대통령은 미국매스컴에 거의 매일 오르내렸으며 특히 휴전협상과정을 통해 얕
-
(3192)제74화 한국 외교 요람기(59)
54년4월27일 제네바정치회의 개막연설에서 수석대표인 변영태 외무장관을 통해 한국통일에 관한 기본입장을 표명한 한국대표단은 20일 가까이 토론을 벌여도 자유진영과 공산측 사이의 의
-
(3189)제74화 한-미 외교 요람기(56)|한표욱|축소 제네바 회의
「델레스」미 국무장관이 북한제안을 반박하는 연설을 마치자 중공의 주은래가 연단에 올랐다. 주은래는『중국이 5대 국외상의 일원으로서 이 회의에 참석하여 가장 긴박한 아시아의 제 문제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186)제74화 한-미 외교 요람기(53)|한표욱|제네바 정치회담
미·소·영·불 4개국이 한국문제를 위한 경치회담을 제네바에서 열기로 합의한 것은 판문점예비회담이 결렬된 지 약 2개월 후였다. 1954년 2윌18일 독일과 오스트리아 문제를 다루기
-
(3164)한미 외교 요람기(31)|휴전 움직임
50년12월11일「트루먼」대통령주재로 열린 미 국가안전보장회의는 한국전쟁 처리방법으로 휴전을 고려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이 같은 결정은 공개되지 않았다. 회의내용의 요점은 세
-
(3161)|제74화 한미외교 요람기(28)-중공군 개입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한 것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한지 2주일 후의 일이었다. 전쟁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과 원산을 방문하고 국군은 나진까지
-
(26)38선을 넘어서
다시 38선 돌파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겠다. 미국무성과 유엔에서 38선 돌파와 그 이후 문제에 관해 논란이 일어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유엔 대표단에 몇 차례 지시를 내렸다.
-
(3157)제74화 한미 외교 요람기(24)
38선 돌파 문제에 관해 국무성 관계자들이 이견으로 맞서있던 때에 「애치슨」 국무장관은 여름 휴가 중이었다. 8월말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애치슨」의 책상 위에는 한국문제에 관한
-
(3156)제74화 한미 외교 요람기(23)38선 돌파 논쟁
6·25 동란 발발직후 미국이 신속하게 해·공군지원을 표명하고 유엔 참전 결의를 주도한데 대해 대부분의 국가들이 갈채를 보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같은 움직임에 고마워하면서도 만
-
(3156)제74화 한미 외교 요람기(22)|2차 유엔안보리
6월26일「트루먼」대통령을 만나고 난 뒤 장면 대사와 나의 마음에는 다소 활기가 솟았다. 대사관에 돌아와「트루먼」대통령과의 면담 내용을 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 일하고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