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3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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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32. 林炳稷대사의 부탁

나는 1952년 켄트주립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을 타진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귀가 닳도록 옥스퍼드 얘기를 들은 데다 그곳에서 공부한다면 부모님께 끼친 걱정을 뒤늦게나마 보상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끝내 옥스퍼드로부터 소식이 없자 나는 뉴욕의 컬럼비아대학 박사과정으로 진학했다.

당시 컬럼비아대학에는 이한기(李漢基.작고)전 총리서리가 교환교수로 와 있는 등 한국인들이 적지 않았다.

강원룡(姜元龍)목사, 박준규 국회의장, 김옥렬 전 숙대총장, 설원식 대한방직 명예회장, 신도환 전의원,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김은우(작고)전 이대교수, 정희경 의원 등이 그때 가깝게 지낸 유학생들이다.

정세영회장은 내가 살던 아파트에 자주 놀러왔는데 한식 요리솜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여서 유학생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고달픈 유학생시절이라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친 분도 적지 않다. 배고프면 무작정 배상명(상명여대 설립자.작고)선생이나 성악가인 김자경 선생을 찾아갔는데 그분들은 싫은 내색도 없이 '고생이 많다' 며 먹을 것들을 챙겨준 고마운 분들이었다.

전상진(외교협회 고문)뉴욕총영사관 부영사는 집이 컬럼비아대학 근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유학생들의 손쉬운 '공격목표' 가 됐고 수시로 드나드는 유학생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했었다.

나는 뉴욕에 있으면서도 예의 학생운동끼가 발동해 53년 가을 '재뉴욕한인유학생회' 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거창한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빛좋은 개살구' 였다. 우선은 운영자금이 없어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뉴욕에 있던 한국유지들을 초청, 크리스마스 모금파티를 연다는 아이디어를 짜냈다.

그러나 파티를 열 비용이 없었다. 일단 뉴욕 유지들 중 돈을 꿔줄만한 사람을 찾기로 했다. 1순위로 꼽힌 분이 유창순(전 국무총리)한국은행 뉴욕사무소장이었다.

나는 무작정 유소장을 찾아가 '뉴욕 최고의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에 회의실까지 빌려 놓았다' 며 자금을 빌려주면 꼭 갚겠다고 떼를 썼다. 유소장은 황당하다 못해 한방 크게 얻어 맞은 표정이었다.

내가 웬만해서는 물러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유소장은 마지못해 돈을 빌려 주었다. 파티 당일날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는 한국 유지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예쁜 한복을 입은 여자 유학생들이 파티장 입구에서 돈바구니를 들고 손님들을 모셨다. 유지들은 학생들 앞에서 '젊잖은 체면' 을 유지하느라 망서리는 기색 없이 척척 돈을 냈다.

모금액은 상당히 많아 빌린 돈을 다 갚고도 8백달러 정도 남았던 기억이 난다.

그날 귀빈 중에는 최규남(전 문교장관)서울대 총장, 윤치영 유엔총회 한국대표, 임병직(전 외무장관)유엔주재 한국대표부 대사 등도 참석했다.

특히 임대사는 이 모임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때때로 나를 불러 요리를 사주기도 하고 용돈까지 주었다. 별 생각없이 신세를 진 것이 나를 옭아 맬줄은 정말 몰랐었다.

하루는 강영규(전 필리핀대사)유엔대표부 3등 서기관이 임대사가 급히 찾는다고 연락을 해 왔다. 임대사는 날 보더니 대뜸 '한국대표부 주최로 유엔회원국 대사 초청 파티를 열려고 하니 유명인사를 좀 끌고 오라' 고 부탁했다.

한국이 유엔에서 미미한 존재였던 시절이라 유명인사를 '미끼 상품' 으로 내걸어 외교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였다.

임대사는 "얼마 전 신문을 봤더니 청춘스타 마릴린 먼로가 뉴욕의 브로드웨이 연극학교에 와 있더군" 하며 꼭 남의 얘기하듯 툭 내뱉었다.

나는 혹 잘못들었나 귀를 의심하며 "설마 저더러 마릴린 먼로를 데려오라는 것은 아니겠죠" 하고 한발 뺐더니 "먼로가 오면 손님이 많지 않겠어□ 애국이 뭐 별건가" 하며 정색을 하는 게 아닌가.

이동원 전 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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