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4)국립경찰 창설 제41화(32)
제주에서 일어난 4·3폭동사태는 정부가 수립된 지 두달이 되도록 진압되지 않고 또 하나의 끔찍한 사태를 불러왔다. 폭동진압이 늦어지자 정부는 그해 10월 여수에 주둔하고있던 국방
-
(1158)기독교 백년(29)|강신명
영락교회가 월남한 피난민들의 피땀으로 세워져 현재의 본당에서 6월18일 주일에 감격적인 입당예배가 있은 다음 새 예배당에서 두 번째 주일예배를 본 1950년 6월5일 비극의 동란
-
도의문화 심포지엄(70)
조국이 광복된지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세월이 여시라더니 멀지않아 일제치하의 36년과 맞먹는 분단의 기간이 흘러갈 것만 같다. 광복이란 나라를 빼앗긴 민족에게 꿈에도 잊을 수
-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9)-제자=김홍일|김성주의 별명도 김일성
김좌진 장군을 죽인 김일성은 죽고 또 간도폭동사건의 김일성도 소련으로 도망친 후인 1930년 겨울께 김성주도 김일성이란 별명을 갖게되었다. 회덕현 오가자에서의 일이다. 김성주의 두
-
남북대화의 꾸준한 추진
남북조절위 제5차 부위원장회의와 남북적십자 제4차 대표자 회의를 오는 3월27일과 4월3일 각각 판문점에서 열기로 합의함으로써 다시 한번 대화의 자리를 갖게 되었다. 이 같은 대화
-
살인! 폭동! 그리고 인민 재판!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 버려진 한 인간, 「상필」은 인민군 출신으로 포로가 되어 에 던져진다. 밤마다 되풀이되는 살인과 인민 재판, 그리고 폭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인
-
북괴의 최근 군사동향
북한 괴뢰는 육·해·공군을 망라하여 병력이동·군사기지 신설·장비 현대화 등 「전면적」인 군사 재배치를 통해 전쟁준비에 광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 졌다. 북괴의 이 같은 군사동향은
-
납북어부 생사 등 요구
대한적십자사는 25일 상오 10시 판문점 중립국감독위 회의실에서 열린 두 번째 남북적십자 대표회의에서 서해 상에서 격침·피납 된 수원 32, 33호의 어부들을 간첩으로 모는 북한
-
서해상의 해적행위
국방부발표에 의하면 15일 상오 백령도 서쪽 30「마일」공해 상에서 어로 중이던 우리 나라 어선 수원32호 및 33호는 북괴포함의 함포 사격을 받아 그중 32호는 침몰했으며, 33
-
"북한도전자세 노골화"
문공부 대변인 김동호 보도국장은 9일『북한공산집단이 최근 전에 없이 군사대결을 주장하고 마치 대대적인 전투행위를 즉각 개시할 것처럼 도전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밝히고『북한공산
-
"적화 선동 주목해야"
정부 대변인 윤주영 문공부 장관은 4일 북한 김일성의 신년사에 대한 특별 담화를 발표, 『북한 김일성이 지난 72년, 73년 신년사에서는 남북 적십자회담·남북 공동성명을 높이 평가
-
「북의 위협」잊지 말도록
김종필 국무총리는『최근 일부 유신이념이나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극단적인 표현으로 학생·노동자들을 자극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사회불안을 조성하고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운동은
-
숭남 사상
월북작가 김남천이가 쓴 단편소설에 이라는 게 있다. 그 속에 한「인민군」병사가 전사할 때에 머리를 남으로 두고 죽었다는 대목이 있었다. 요새 본지에 연재되고 있는 『내가 아는 박헌
-
(853)|내가 아는 박헌영(172)-박헌영계 숙청
이승엽「그룹」에 대한 재판은 1953년 8월 3일에서 6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되었었다. 재판장은 김인선이며 담당판사는 방용숙·박영호였다. 검사 측은 명사부총장 김동학이 참가하였으며
-
(844)|내가 아는 박헌영(163)|박갑동
나는 중강진에서 산 몇 개를 넘은 산골짜기에서 겨울을 보냈다. 겨울을 넘겼다 하여도 봄이 오도록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내각간부학교 특별 반을 마친 2윌 20일에 그
-
(843)|내가 아는 박헌영(162)|박갑동
김일성 파 이외 파에 대한 비판을 본다면 소련파의 김 열은 총살, 태성수(노동신문 주필·문화선전부장)는 철직 당하였다. 중공 파로서는 제2군단장인 무형이가 오랫동안 감금당해 있다
-
(842)|내가 아는 박헌영(161)|박갑동
패퇴하여 만주까지 도망치게 되어 궁지에 빠진 김일성은 전쟁을 중간 결산하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회 전원회의의 보고문안을 기안할 권한까지 잃고 그 기초를 부위원장인 허가이에게 위
-
(841)|내가 아는 박헌영(160)|박갑동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이른바 북한노동당의 무력통일기도는 한국국민의 완강한 항전과 「유엔」군의 개입에 의하여 완전히 파탄되고 말았다. 한국국민은 기습을 당하여 한때 수도 서울시를
-
(839)|내가 아는 박헌영(158)|박갑동
나는「유엔」군에 쫓기며 맨 마지막으로 포천 지방을 통과하여 38선을 넘어 연 천에 도착하였었다. 38선을 넘어 이북 땅을 디딘 것은 해방 후 처음이었다. 쫓겨나면서도 그때 나의
-
(833)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52)
북한의 이른바 「남반부 해방지구에 대한 정책」은 앞서도 말했듯 6·25동란 두 달 전인 4월, 조선노동당 정치위원회에서 그 대강이 결정되었었다. 김일성은 그 결정에 의하여 남파요
-
(830)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49)|박갑동
나는 6월26일「라디오」방송에 의하여「유엔」이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군의 공격을 침략이라고 인정하며 38선 이북으로 철퇴를 요구하는 결의를 한 것을 알았다. 그리고 27일에는「유엔
-
(825)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43)
박헌영의 입장은 곤란하였다. 남로당지하당의 평화통일 방안을 중요한 자료로 제출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남로당지하당이 괴멸된 이상 자기의 발언의 무기가 줄어든 것을 느끼지 않을
-
(824)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42)
김삼룡이 잡히고, 이주하가 잡히고, 그리고 또 정태식까지 드디어 잡히고 말았다. 이 세 사람이 잡혔다는 것은 남노당 지하당의 괴멸을 의미하는 것이며, 사실 박헌영의 발 밑에서,
-
(818)내가 아는 박헌영(136)|박갑동(제자 박갑동)
무력준비에 나선 북한은 1949년 7월에는 「조국보위후원회」(군사후원회)를 면·이 등 행정단위의 말단까지 조직하고 민간에서 비행기와 전차를 구입, 헌납하는 운동을 일으켜 군비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