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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4)<제자 박갑동>|<제31화>내가 아는 박헌영(163)|박갑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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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눈 속의 평양 길>
나는 중강진에서 산 몇 개를 넘은 산골짜기에서 겨울을 보냈다. 겨울을 넘겼다 하여도 봄이 오도록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내각간부학교 특별 반을 마친 2윌 20일에 그 산골짝을 떠났었다. 눈이 허리까지 쌓여 길도 없어졌다. 살을 에어 낼 듯한 차고 모진바람이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눈보라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화전민할머니가 나를 위하여 특별히 지어 준 목이 장화와 같이 길어 무릎까지 오는 버선에다가 짚신을 신고새끼로 친친 동여매어 눈 속에 발이 빠져도 짚신이 벗어지지 않게 채비를 하였던 것이다.
옛날 강계 사냥꾼들도 다니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산골짝과 산 고개를 넘어 평양으로 향하였었다. 정말 이렇게 원시적 생활을 해본 일은 처음이다. 먹는 것도 강냉이죽과 간혹 강냉이떡뿐이다. 길을 잘못 들어서인지 아무리 걸어도 집 한 채 보이지 않으며 날이 저물어 캄캄해 지척을 분별할 수 없는 밤에 눈보라가 앞을 막아 한 걸음도 옮길 수가 없어 배는 고프고 여기서 얼어죽는가 싶은 고비도 몇 번 겪었다.
한번은 캄캄한 밤중이 되어도 집을 찾지 못하여 눈보라치는 들을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걸어가는데 공중에서 미군 기가 촬영을 하는지 번갯불과 같이 번쩍번쩍 화 광을 비추며 들고 있었다. 그 밑에 기차가 가다가 비행기 때문에 가지 못하고 들판에 정거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평양 쪽을 향하고 있는 중공군의 군용열차였다. 화차의 문이 열려 있는데 보니 화차마다 중공군이 가득 타고 있었다. 내 생각에 그 기차만 탄다면 수월하게 평양 쪽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문이 열린 기차 앞에 가서『동지들! 수고합니다』하고 중국어로 인사를 하며 『나는 내각의 간부인데 지금 길을 잊어서 곤란하니 태워 주면 감사하겠다』고 하였더니 그들은 기차 위에서 내려다보며 안 된다는 것이었다.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들은 우리를 소국이라고 깔보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좋게 말해서는 안될 것 같아서 갑자기 큰소리로『그것이 무슨 소린가? 당신들 부대장이 누군가, 이리 곧 오라 하시오. 조·중 인민은 옛날부터 서로 도우며 형제와 같은 사이요, 당신 네 혁명에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지 아는가? 우리들도 일제를 반대하는 조·중 양 민족의 공동투쟁을 위하여 중국 땅에서 피를 흘렸소. 이 땅은 우리 땅이란 말이요. 당신들은 손님들이요. 이 밤중에 주인 되는 조선간부가 곤경에 빠져 기차를 즘 태워 달라는데 거절하는 그런 국제우의가 어디 있는가』하고 따지니까 그들은 한말 대꾸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나의 엉터리 중국말이라도 그들이 어느 정도 알아들은 것 같았다. 나는 그 기회에 얼른 화차에 올라탔었다. 화차에 오르기는 올랐는데 머리 위에서 비행기가 뺑뺑 돌고 있어 30분이 넘어도 기차는 떠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화차 안의 중공군들은 기침을 콜록콜록하며 가래침을 뱉는데 발 밑을 보니 담이 깔려서 미끄러질 정도였다. 더럽고 기침 때문에 그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드디어 뛰어내리고 말았었다.
이러한 고생을 하여가면서 나는 3월 16일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약25일간 걸은 셈이다. 평양에 도착하여 중앙당으로 가볼까 하였으나 거기는 이승엽 패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찾아갈 생각이 나지 않아 내각간부 국으로 갔었다. 거기 가니 문화선전 성 구라파부장을 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직장이 당장 간단히 정해지므로 이번에는 정태식의 소식이 궁금하여 당시 농업 상을 지낸 박문규를 찾아가 봤다.
박문규는 이강국 후임으로 재2대 민전 사무국장을 하였기 때문에 그때 매일같이 접촉하여 잘 아는 사이였다. 농업성은 그때 남포 가는 쪽 교외의 산밑 방공호 속에 있었다. 방공호 속으로 들어가니까 우연히 서울서 알았던 남로 당원을 만났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정태식 동무 만나러 왔소?』하는 것이었다. 정이 박문규 밑에서 계획 처 부 처장을 하고 있다는 깃이었다.
거기서 바로 정태식을 만났었다. 너무나 반가웠다. 그리고 박문규가 정태식을 많이 동경하여 주는 것을 알고 나는 안심하였다. 정태식과 같이 박문규를 만나니 박문규는 나를 문화선전 성 구라파부장보다 대우를 더 잘해 주겠으니 농업성 교육부장으로 와 달라면서 농업성 간부부장을 곧 내각간부 국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각간부 국에서 농업성 교육부장은 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으나 문화선전 상 구라파부장은 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안 된다고 하여 나는 내국 문화선전성의 허정숙의 밑으로 가게 되었었다. 그곳에서 나는 또 채항석도 무사히 살아 부부가 평양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박문규를 만나고는 곧 월북해 있는 채항석의 집을 찾아갔었다. 채항석의 집은 농업성의 산 뒤 기슭에 있었다. 오두막집이었다. 채의 부인 장병민은 반가워하며 『그렇지 않아도 정태식 선생과 늘 박 선생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며『박 선생님, 저는 여기 와서도 또 정 선생 밥장사하고 있어요』하며 웃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월북하여 온 경위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8월말에 서울 자기 집 앞에서 인민군의 오발로 다리를 다쳐 9월에 그녀의 남편 채항석이 이북으로 후퇴할 때 같이 후퇴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자기아버지 덕택으로 아무 탈없이 살수 있었다. 12월말에 또다시 인민군과 중공군이 서울에 접근해 올 때 서울사람들은 또 한강을 넘어 일시 피난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었다.
그때 장병민의 아버지 장택상은 한국대표로 UN으로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장택상은 혼자 서울에 남아 있는 딸을 생각하여 자동차를 가지고 와서 같이 대구까지 피난 가자는 것이었다. 장병민은『여필종부라 채 서방이 오는 것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하였더니 그의 아버지는「여필종부」라 혼잣말 같이 되풀이하면서 서운하게 혼자 돌아가더라는 것이었다.
나도 마음속으로 혼자「여필종부」라 중얼거리며 참으로 여자의 운명은 남편에 매였구나 고 느끼며 왜 그런지 장병민의 운명이 애처롭게 생각되었었다. 부귀를 겸한 명문의 집 딸이 오두막집에서 석탄재를 둘러쓰고 비단 같은 손이 얼어 터진 것을 보니 내 마음이 한없이 아파 그녀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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