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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9)-제자=김홍일|김성주의 별명도 김일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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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김좌진 장군을 죽인 김일성은 죽고 또 간도폭동사건의 김일성도 소련으로 도망친 후인 1930년 겨울께 김성주도 김일성이란 별명을 갖게되었다. 회덕현 오가자에서의 일이다.
김성주의 두목 이종락은 1930년8월에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란 조선혁명군과는 아무관계도 없는 좌익무장단체(약50명)를 발족시키고 그가 1929년 가을이래 조직한 길흑농민동맹을 통해 회덕·이통 양현하 한인농촌에서 지배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길흑농민동맹사건의 진원>
이 때에 김성주는 이종락의 지시로 다른 대원들과 같이 이 지방 한인농촌을 내왕하면서 세금도 거두고 농민동맹일도 보고 있었다. 이 지방은 김성주가 1929년 가을, 그러니까 그가 남만학원으로 가기 전에도 이종락 부대의 대원으로 돌아다니던 곳이다. 이 지방에서 한인이 제일 많이 사는 곳이 오가자와 그 인근 일대였다.
오가자에는 길흑농민동맹조직이 들어오기 전에 요하농촌공소란 한인자치단체 본부가 있었으며 그 책임자는 이만진씨(89·서울영등포거주)였는데 이씨는 2세 교육 때문에 삼성국민학교를 세워놓고 있었다. 교장은 아동문학가 이몽린이었고 고이허·최형우(일명 최일천)·안육주 등이 선생으로 있었다.
1930년11월쯤 김성주는 오가자에서 두어달 묵은 일이 있다. 이만진씨 집에서 그의 아들 이선일씨(62·서울영등포거주)와 함께 한방에서 살았다. 김성주는 성질이 매우 잔인해서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은 으례 반동으로 몰아 죽이기도 했는데 그런 일련의 살인사건으로 길흑농민동맹사건이란 것이 발생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삼성학교선생 최형우(당시33∼34세·정주사람)가 김성주에게 『만주에서는 중국사람식으로 당호(별호)란 게 있어야 하는데 자네도 당호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김성주는 좋은 당호 하나를 지어 달라고 최형우에게 부탁했다.
최형우는 당호 몇개를 지어보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했다. 김성주는 여러 개의 당호 가운데서 「일성」두 글자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자기도 한번 장군이 되고싶다고 했다.
그래서 최형우는 『그래, 그럼 우선 별 하나만 달아보자』하며 「일성」이란 당호를 써주었다.
이때 김성주가 여러 개의 별호 가운데서 하필이면 「일성」을 골라잡은 이유는 무엇이었겠는가. 김좌진 장군을 죽인 김일성, 간도폭동사건의 김일성 등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면 그것에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성주가 「일성」이 마음에 든다고 골라잡으면서 자기도 한번 장군이 되고 싶다고 했다는 그 심리상태에는 다음의 두 가지 사연이 영향했다고 분석할 수 있다.
1919년 2월15일에 대동군 용산면 하리에 있던 창덕학교에 선생으로 있던 현응수씨(82·광림교회 장로·서울금호동거주)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내가 창덕학교에 부임한지 꼭 10여일만에 3·1운동이 터졌다. 창덕학교에서는 3월4일에 만세를 불렀다. 당시 교장은 강돈욱 장로였다.

<항일 김일성 장군 얘기 듣고>
3·1운동 직후부터 노만국경에서 조선독립을 위해 용감히 싸우고있는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가 들려왔는데 글자는 어떻게 쓰는지 몰라도 김일성 장군이라 했다. 나는 교장 강 장로 집 안방에서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때 김성주는 강 장로 무릎 앞에 앉아서 우리어른들 이야기를 듣곤 했다.
북에서는 3·1운동 때 김성주가 외가식구를 따라 자진해서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고 하나 그의 나이는 일곱살에 불과해 만세운동참가란 우스운 얘기다』.
김성주는 어릴때들은 김일성 장군 이름에 영향되어 「일성」이란 별호를 골랐던 것이 아니겠는가, 또 그래서 장군이 되고싶다고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또 한가지 사연은 김성주가 오가자에 있을 때 같은 패의 한사람인 변달환의 아버지 변대우로부터 또 한번 김일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실이다. 변대우는 철마단이란 독립단의 단장이었던 사람인데 철마단은 후에 정의부에 흡수되었다. 이 변대우가 합방 직후부터 김일성이란 독립군 대장이 함경도와 간도사이에서 용감하게 싸웠는데 여러 해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이야기를 했다. 이선일씨는 김성주와 같이 그이야기를 들었다. 김성주가「일성」을 고른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도 있음직하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옛날에 김일성 장군이란 항일투사가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고 있다.
또 김성주가 애국투사 김일성의 이름에 영향을 받고 「일성」이란 호를 골랐든, 아니든 간에 그는 결코 애국투사의 근처에도 갈 수 없었던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장군이 되고싶다던 욕심도 해방 후 평양에 주둔했던 로마넹코 정치사령부의 음모에 의해 그렇게 불리게 되었을 뿐이지 그 이전에 우리 국민은 물론 김성주의 한패끼리에서도 그는 장군칭호를 받아 본 일이 없다.

<「유일혁명전통」조작 각본>
어쨌든 1930년 겨울에 오가자에서 최형우로부터 일성이란 별호를 지어 받은 때부터 김성주는 그들끼리 사이에서 김성주 또는 「김일성」으로 통했다.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김성주가 오가자에 있을 때 김일성으로 불리다가 곧바로 김일성으로 고쳐 불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해방 후 소련군의 음모로 김일성 장군으로 등장하기까지 「김일성」으로 불린 일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지만 만주사변 몇해 후에 중공당 유격대장으로 등장하는 김일성이란 사람은 김성주가 아닌 것이다.
북한에서도 중공당 유격대장 김일성을 김성주라고는 하지 않는다.
도시 중공당 유격대에 가담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김성주의 별명이 김일성이었다고 하면서 동시에 그 중공당 유격대강 김일성이 저지른 몇 개의 사건을 끄집어다가 그것을 김성주가 한 것으로 꾸며놓고 있다. 2중3중으로 거짓말이 겹쳐져 있다.
바로 이 대목과 그리고 본명 김성주를 김성주라고 슬쩍 바꾸어놓은 대목이 바로 김성주의 소위 「유일혁명전통」조작의 가장 기초적인 각본의 부분이다.
김성주의 별명을 둘러싸고 경력을 조작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은 바로 「일성」이란 호를 지어준 최형우 그 사람이다. 최는 해방 후 서울에 와서 신진당의 중앙위원으로도 있다가 우리 농림부에서 일했었다.
그는 6·25때 인민군에 총살됐다. 이 사람은 45년12월 서울에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란 책자 하나를 낸 일이 있다.
잘못된 기록투성이의 책인데 그 속에서 최는 북한의 실력자로 등장한 김성주를 의식해서인지 김을 추켜세우는 글을 남겨놓고 있다.
김성주를 김성주라 오기했고 길림의 육문중학을 다닌 것을 제오중학이라 하는 등 김에 관해서도 잘못된 기록이 많은데 별명문제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사실을 왜곡하고있다.

<아첨하느라 사실을 왜곡>
『동지들은 그의 장래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일성이라는 아호의 선물을 주었다. 이로부터 김은 일성 또는 일성으로 행명하였다』라고 적어 놓고 있다.
북한에서는 이 최형우의 책을 인용하여 『김일성이란 이름은 그가 오가자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에 동지들이 붙인 이름이다.
처음엔 일성이라 불렀으나 하나의 별보다는 태양이 되어야 한다해서 일성이라 고쳐부르게 되었다』라고 하고있다.
최형우는 김성주가 일성이란 별명을 갖게된 경위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장본인인데도 김성주에게 아첨하느라고 사실을 왜곡하여 기록했지만 결국은 김성주의 인민군에 의해 총살됐다.
이선일씨는 이 최의 글은 터무니없이 사실을 왜곡한 것이라 말했다. 본명도 김성주였다 한다. 한 방에서 두어달 같이 살 때의 일이기 때문에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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