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아이] 김치찌개 회동에 대한 뒤끝

    김필규 워싱턴특파원 좀 지난 일이긴 하다. 지난달 24일 윤석열 대통령이 출입기자들을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으로 초청해 김치찌개를 대접했을 때 이야기다.   윤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전 세계 모든 지도자나 정치인들이 언론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언론이 없으면 그 자리에 갈 수가 없다”며 “언론으로부터 비판도 받고 공격받을 때도 있지만 결국은 언론 때문에 저와 우리 정치인들 모두가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출입기자단 초청 만찬 간담회’에서 김치찌개를 끓이고 계란말이를 만들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그만큼 ‘언론이 중요하다’는 덕담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누군가를 어떤 자리에 오르도록 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일까.   아니면, 누군가를 끌어내릴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아 자리 보전케 해줬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앞의 맥락과 별로 다르지 않은 말이다.   윤 대통령의 이야기가 불편하게 들린 것은 그간 미국 대통령들이 언론과 관련해 수시로 내놨던 말들과는 결이 달랐기 때문이다.   속으론 역시 ‘언론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을지 모를 미국 대통령들이 기자들 앞에서 한 언론 관련 발언을 보면 대부분 ‘견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언론은 불의를 폭로하고, 나와 같은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해준다.”(버락 오바마)   “언론은 우리가 미래를 위해 올바른 결정을 내리게 하는 데 필수적” (로널드 레이건)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4대 대통령인 제임스 매디슨은 “언론의 자유는 자유 정부의 수호자며 독재를 막는 방어선”이라고 했고, “언론 없는 정부보다, 차라리 정부 없는 언론을 택하겠다”고 한 토머스 제퍼슨(3대)의 말은 이미 너무 유명하다.   현직인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4월 세계 언론 자유의 날을 맞아 “언론 자유에 대한 탄압은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라며 “언론을 침묵시키기 위해 악의적인 행동을 취하는 이들에겐 제재를 승인할 것”이라고 했다.   언론이 과거에, 어쩌면 지금도 누군가를 어떤 자리에 올리고 내리는 데 치중하고 있지 않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사회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독재와 권위주의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뒤따른 부산물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냥 출입기자들 불러 밥 같이 먹는 자리에서 가볍게 나온 이야기를 가지고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게 아니길 바란다. 윤 대통령의 언론관도 동맹인 미국 대통령과 크게 다르지 않기를 또한 기대해본다.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2024.06.14 00:22

  • [글로벌 아이] 엔비디아 젠슨 황의 키노트를 돌려보는 이유

    신경진 베이징 총국장 “1000달러짜리 개인용컴퓨터(PC)에 500달러짜리 GeForce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추가하면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됩니다. 데이터센터도 마찬가지입니다. 10억 달러(1조3700억원) 규모의 데이터센터에 5억 달러(6850억원) 상당의 GPU를 보태면 순식간에 인공지능(AI) 공장이 됩니다.”   지난 2일 오후 타이베이의 국립대만대 체육관. 청중 6500여 명 앞에서 AI 구동 원리를 설명하던 젠슨 황(61) 엔비디아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가 곧 영업사원으로 변신했다.   “속도는 100배 빨라지지만 비용은 1.5배 증가합니다. 더 많이 (엔비디아 GPU를) 구매할수록 당신은 더 많은 돈을 아끼게 됩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꼭 들어맞는 CEO의 셈법입니다.”   젠슨 황 이날 젠슨 황의 영어 강연 ‘새로운 산업혁명의 새벽’은 유튜브로 생중계됐다. 중국은 예외였다. 엔비디아는 행사 뒤 한글·중국어·일본어 자막을 서비스했다. 일주일 만에 500만 명 넘게 시청했다.   하이라이트는 2026년 출시할 코드네임 ‘루빈’을 소개할 때였다. 대만 TSMC 등 파트너사를 한계까지 밀어붙여 만들겠다고 했다. 천체의 회전속도를 계산해 암흑 물질을 발견한 미국 천문학자 루빈의 이름을 따 올해 말 출시할 ‘블랙웰’과 연결했다.   시장은 환호했다. 강연 다음 날 나스닥의 엔비디아 주가는 4.9% 급등했다. 시가총액은 3조 달러를 돌파했다. 블룸버그는 미국의 대장 주 마이크로소프트·엔비디아·애플 등 3개사의 시총 9조2000억 달러는 중국 증권거래소의 전체 시총 9조 달러를 제쳤다고 집계했다. 황의 재산은 140조 원대로 불었다. 세계 13위 자산가가 됐다.   이날 황은 옴니버스·토큰·물리적 AI·로보틱스 등 미래를 이야기했다. 타이베이의 지인은 “대만은 요즘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문제는 관심 없이 온통 엔비디아와 AI에 푹 빠졌다”라며 “반도체 관련 업체들이 똘똘 뭉쳐 세계 반도체 거물들과 네트워킹에 몰두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중국은 초조하다. 5~7일 난징(南京)에서 ‘2024 세계반도체대회’를 열었다. 대만 국제컴퓨터전(Computex) 맞불 행사다. 참여사는 지난해 300개 사에서 200곳으로 줄었다. 인텔·퀄컴 총수는 타이베이를 택했다. 심지어 양안을 가른 황의 세계 AI 지도에도 당국은 꿀 먹은 벙어리다.   한국 기업의 총수는 타이밍을 놓쳤다. 한국발 뉴스의 앞자리는 의정 갈등과 풍선 공방 등이 차지했다. AI의 신세계를 주도하는 황의 키노트(keynote)를 계속 돌려보게 되는 이유다.     신경진 베이징 총국장

    2024.06.11 00:29

  • '트럼프 유죄'에도 조용한 바이든…'비호감 대결'의 딜레마 [김필규의 아하, 아메리카]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이달 초 미국의 진보 성향 시민단체 '무브온(MoveOn.org)'은 부랴부랴 5만장의 스티커를 제작해 배포에 들어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얼굴 위에 '중범죄자(Felon)'이라는 글자를 얹은 스티커다.     지난달 30일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자신의 성추문 입막음을 위해 거액을 지급하고 회사 장부를 조작한 혐의에 대해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에서 유죄 평결을 받았단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추진한 이벤트다. 홈페이지에선 누구든 주소만 기재하면 해당 스티커를 무료로 보내주겠다고 적었다. 무브온 측은 "마침내 트럼프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면서 "트럼프의 백악관 입성을 막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진보 시민단체 '무브온'이 무료 배포하고 있는 '트럼프는 중범죄자' 스티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유죄평결이 나오자 제작에 들어갔다. MoveOn.org 트럼프에 반대하는 전직 공화당 전략가들의 모임 '링컨 프로젝트' 역시 이 기세를 몰아 트럼프를 더 몰아붙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죄 평결이 나온 당일부터 "트럼프, 당신은 범죄자"라는 동영상을 만들어 소셜미디어에 뿌리고 있다. "이참에 트럼프의 이마에 '중범죄자'라는 문신을 새겨야 한다"는 게 제프 티머 링컨 프로젝트 수석 고문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와 달리, 정작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캠프는 너무 차분한 모습이다. 뉴욕에서 재판이 진행된 지난 몇 주간, 트럼프의 재판 결과가 이번 선거 판도를 바꿀 것이란 전망도 나왔지만, 바이든 캠프에선 그러려는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중동 전쟁 휴전안에 대한 대국민 연설을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유죄 평결을 받은 다음날이었지만 이와 관련해선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 사법체계를 존중해야 한다"는 정도의 메시지에 그쳤다. 로이터=연합뉴스 실제 한 캠프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 재판 이후에도 특별히 선거 전략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이라 전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앞으로 트럼프가 겪을 고통은 굳이 우리가 프레임을 만들지 않아도 언론 등을 통해 유기적으로 일어날 것"이란 이야기였다.     심지어 바이든 캠프 내에선 앞으로 트럼프를 두고 "범죄자"라는 용어를 쓸지 말지를 놓고도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평결 나흘만인 지난 3일 코네티컷 그리니치의 연설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를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중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전직 대통령"이라고 처음 표현했지만, 그나마도 비공개로 진행된 모금행사에서였다.      ━  "트럼프 유죄라고 바이든 입지 강화 힘들어"   상대 후보가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것은 선거 공학적으로 봤을 때 더 없는 호재다. 그런데도 바이든 캠프가 로키(Low-key) 전략으로 가는 것은 이번 미국 대선이 기록적인 '비호감 대결'이기 때문이다.   CNN은 트럼프가 유죄라고 해서 바이든의 불안한 대중적 입지가 강화될 가능성은 작다고 분석했다. 공화당원이든 무당층이든, 트럼프를 찍겠다고 결심한 유권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트럼프를 정말 좋아해서가 아니라 바이든이 더 싫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럼프에게 어떤 악재가 있다 해도 그 표가 바이든에게 흘러들어오긴 힘들다.    이런 정황은 여론조사 숫자로도 드러난다. 최근 마퀘트대 로스쿨 여론조사(지난달 6~15일, 미 유권자 1033명)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반 이상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부패했다는 데 동의했다. 그런데도 이들 중 3분의 1은 '그래도 트럼프에게 투표하겠다'고 답했다. 그런 모순된 결정을 내리게 된 주된 배경은 '바이든의 대통령 직무수행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90%)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의 유죄 평결을 두고 섣불리 공격하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게 바이든 캠프의 계산이다. 되려 트럼프 지지층만 결집하고, 중도층의 마음도 떠나게 할 수 있다.    레이 라 라자 에머스트대 교수(정치학)는 "바이든 대통령뿐 아니라 민주당에게도 누군가를 비웃는 것은 자신들의 브랜드가 아니다"라며 "상대를 비아냥거리는 것은 오히려 트럼프 캠프가 자신의 지지층을 동원하는 데 쓰일 수 있다"고 봤다.      ━  "서로의 약점을 가려주는 공생 관계"   트럼프 캠프도 고민은 마찬가지다.   바이든 대통령에게 투표하겠다는 민주당원·무당층 가운데 상당수는 바이든이 정말 좋다기보다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것만은 막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정한 이들이다. 따라서 바이든이 계단에서 넘어지거나 고유명사를 틀리는 등 특검 보고서의 표현대로 '기억력 나쁜 노인'의 모습을 자꾸 보인다 해도, 바이든에 실망한 표가 트럼프에게 가기는 힘든 구조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약점이 다른 사람의 약점을 무디게 만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바이든의 고령 논란, 실패한 물가 정책은 트럼프가 중범죄자라는 사실을 가려주고, 반대로 바이든의 실정은 그가 트럼프라는 악당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용서가 되는 모습이다. 여느 선거였다면 치명적일 수 있는 부분들을 서로 가려주며 정치 생명을 이어가는 일종의 공생관계인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에서 유죄 평결을 받은 뒤 "수치스러운 재판"이라며 "진짜 판결은 11월 대선에서 내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AP=연합뉴스 그러다 보니 이번 유죄 평결을 두고 바이든 캠프와 트럼프 캠프에서 나온 메시지도 결국 같은 결론이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평결 직후 법원의 기자들 앞에서 "수치스러운 재판"이라며 "진짜 판결은 11월 대선에서 내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 역시 소셜미디어에 "트럼프를 몰아낼 방법은 투표뿐"이라며 진짜 승부는 대선임을 강조했다    전직 미국 대통령이자 유력한 대선 후보에 대한 유죄 평결이 초유의 사태인 것은 맞지만, 이번 대선의 승부처로 삼기는 힘들다는 판단이다. 공격을 통해 상대방의 표를 빼앗는 전략보다는 지지층을 결집하는 계기로 삼는데 집중하는 모습이다.     워낙 호감도가 낮은 후보들 간의 대결이 펼쳐지면서 새로운 기록이 나올 가능성도 커졌다. 공화당의 선거 전략가 휘트에어스는 "누가 당선돼도 어느 때보다 부정평가가 긍정평가보다 높은 채로 당선되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워싱턴=김필규 특파원 phil9@joongang.co.kr

    2024.06.10 00:24

  • [글로벌 아이] 질 바이든과 ‘3김 여사’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대통령의 배우자인 질 바이든 여사가 스미소니언국립동물원이 게재한 영상에 등장해 “판다가 DC로 다시 돌아온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판다는 미·중 외교의 상징이다. 중국은 1972년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앞두고 처음으로 미국에 판다를 보냈다. 현재 이 동물원의 판다 우리는 비어있다. 양국 관계가 얼어붙으며 지난해 11월 판다 세 마리가 중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질 바이든 여사의 판다 복귀 선언은 대(對)중국 외교의 전면에 영부인이 직접 나섰음을 의미한다.   미국과 케냐 정상 부부가 지난달 23일(현지시간) 국빈만찬에 앞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질 바이든 여사는 지난달 22일엔 백악관 브리핑을 했다. 국빈방문하는 케냐 정상에 대한 영접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브리핑에선 “손님이 떠날 때 내가 케냐를 방문했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이 따뜻함이 가득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2월 케냐를 단독 방문했다. 이번에 워싱턴에 도착한 윌리엄 루토 케냐 대통령 부부를 공항에서 영접한 것도 질 바이든 여사의 몫이었다.   질 바이든 여사는 대선 관련 인터뷰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선거의 쟁점인 고령 리스크에 대해선 “트럼프가 78세고, 조는 81세다. 이번 선거는 나이가 아닌 성격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쟁점인 낙태권과 관련해선 “올해 여성의 권리가 위험에 처해 있다”며 “우리는 민주주의와 혼돈 중에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언론도 그의 적극적 행보에 대해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캠페인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라고 평가한다. 종종 공개 행보를 거의 하지 않는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두 영부인의 행적이 정치적 논란으로 확대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에서도 전·현직 대통령과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의 배우자들이 연일 주목 받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 같이 정치의 중심에서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현 영부인은 명품백 수수 의혹이 불거진 뒤 5개월간 잠행했다가 최근 공개행보를 재개했고, 전 영부인은 옷값 논란과 인도 순방 관련 논란의 중심에 섰다. 거대 야당 대표의 배우자는 법카 유용과 관련한 재판을 받고 있다. 이제 막 개원한 22대 국회의 첫번째 쟁점은 이들 ‘3김 여사’와 관련한 특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여야가 사활을 걸고 상대 진영의 ‘김 여사’를 공격하는 사이에도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유일한 동맹국인 미국의 리더십이 바뀔 수도 있다. 북한에선 언제든 화학무기로 대체될 수 있는 오물 풍선이 날아오고 있다.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2024.06.04 00:28

  • [글로벌 아이] ‘행복을 주는 보물’ 푸바오

    이도성 베이징 특파원 “중국에서 혹시 돈 받으셨어요?”   최근 한 독자에게 받은 메일에 담긴 문장이다. 자이언트판다 푸바오를 둘러싼 학대 논란을 다룬 기사에서 ‘푸바오가 생육관으로 옮겨져 건강히 잘 적응하고 있다’는 중국판다보호연구센터 측 발언을 문제 삼았다. 항의 메일에는 탈모, 비공개 접객 등 의혹을 담은 사진 3장이 첨부됐다. 센터 측은 앞서 이 같은 논란에 “사실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지난 3월 3일 중국 이동을 앞두고 한국 관람객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자이언트 판다 푸바오. [사진 삼성물산] 푸바오의 이름은 ‘행복을 주는 보물’이라는 뜻이다. ‘푸덕이(푸바오 팬)’들은 국내 최초 자연 임신으로 태어난 푸바오를 출생부터 성장까지 지켜보며 가슴으로 양육했다. 국제협약 때문에 부모의 고향인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던 푸바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쏟았다. 이들은 소중하게 키운 ‘내 새끼’를 남의 손에 넘긴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의혹에 ‘푸덕이’들이 분노했다. 서울 명동 주한중국대사관 앞엔 중국 측 해명을 요구하는 시위 트럭이 등장했고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에는 ‘푸바오를 돌려달라’는 청원도 올라왔다.   ‘푸덕이’엔 국경도 따로 없다. 이번 논란을 처음 제기한 이는 이른바 푸바오의 ‘중국 이모’들이다. 푸바오가 중국으로 건너간 뒤 몇몇 소셜미디어 계정엔 비공개 장소에 머무는 푸바오를 촬영한 사진, 영상이 올라왔다. 사육사에게 학대를 당하진 않는지, 식사는 제때 챙겨주는지 등을 영상으로 중계했다. 배변량과 색깔도 확인한다. 제기된 의혹 가운데 하나는 푸바오의 배변이 건강한 초록색이 아니라 하얗다는 것이다.   양 국민이 합심하자 중국 측도 이례적으로 의혹 해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공식 소셜미디어 계정엔 논란에 관한 반박·해명 게시물이 연이어 올라온다. 현지 매체를 불러 푸바오의 모습을 촬영해 공개하기도 했다. 관영 매체를 통해 다음달 푸바오가 일반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라는 소식도 전했다. 앞서 푸바오가 중국에 온 뒤론 새로운 보금자리에 적응해가는 푸바오의 모습을 담은 영상도 꾸준히 올라왔다.   푸바오에 대한 관심을 최근 달라지고 있는 한·중 관계에 대입하는 시선도 있다. 관영 환구시보는 “양국 간 다양한 대화와 교류가 계속 재개되고 있다”고 전하면서 푸바오에 대한 관심을 언급했다. 지난 27일 열린 한·일·중 정상회의도 양국 관계 개선의 물꼬를 텄다. 동북아 안보 등 넘어야 할 산은 많지만 그간 막혀있던 한·중 관계에 돌파구가 마련된 셈이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푸바오의 ‘먹방’ 영상처럼 앞으로 양국 사이의 달콤한 소식도 들려오길 기대해본다.     이도성 베이징 특파원

    2024.05.31 00:24

  • [글로벌 아이] 시칠리아의 버려진 집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지중해 최대의 섬 시칠리아. 1970년대 영화 ‘대부’에서부터 최근엔 미국 드라마 ‘와이트 로터스 시즌 2’의 배경이 된 로망의 섬. 통상 6월에 시작해 9월까지 이어지는 관광 성수기를 앞두고 섬 곳곳에서 활기찬 분위기가 느껴진다. 숙박·요식업소는 물론 주요 관광명소와 상점들도 팬데믹 후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손님맞이에 분주한 모습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슬며시 숟가락을 얹으며 지역 경제를 되살리려는 이들의 노력이 주목을 받고 있다. 다름 아닌 구도심의 방치된 폐가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이탈리아 지자체들의 이야기다.   시칠리아 무소멜리시의 골목 모습. [1 Euro Houses 페이스북 캡처] 시칠리아 중심에 위치한 무소멜리시를 들여다보자. 한때 인구 만 오천 명을 상회하던 이 소도시는 감소하는 출산율과 일거리를 찾아 타지로 떠난 청년층의 이탈로 인구의 30% 이상이 감소했다. 현재 이탈리아의 65세 이상 인구는 23%로 유럽에서 가장 고령 국가가 되었다. 지난 10년간 인구는 100만 명 감소했으며 앞으로도 그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런데 일가구 일주택을 초과하는 주택에 대한 과세 부담이 커 소도시 내 주택 상속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주택을 상속받음으로써 취할 수 있는 경제적인 이익보다 세 부담이 커서 폐가가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무소멜리시는 이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발 벗고 뛰고 있다. 토티 니그렐리 부시장은 최근 미국과 호주 등 해외 방송에 출연해 지역 내 버려진 집들을 소개하며 단돈 ‘1유로’로 꿈의 시칠리아 집주인이 될 수 있다는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물론 조건은 있다. 집값은 상징적인 ‘1유로’지만 3년 안에 자비로 보수해야 한다. 보수공사에 드는 비용은 천차만별이고 부르는 게 값일 수도 있다. 물론 보수 작업 역시 섬 특유의 느릿느릿한 속도에 맞춰 이뤄진다는 현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2008년 시칠리아에서 시작된 ‘1유로 집 프로젝트’는 현재 이탈리아 전역에서 시행 중이다. 남부 유럽 최대 부동산 포털 ‘아이딜리스타(Idealista)’에는 로마 외곽에서 시칠리아까지 수천 채의 이탈리아 폐가가 등록되어 있다. 무소멜리시의 경우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2017년 이후 약 400채의 버려진 집들이 새 주인을 찾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현지 건설업계에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관광객 수도 10배 증가하는 효과를 불러왔다고 홍보한다. 나아가 구도심이 유령도시로 전락하는 현상을 막고 지역 경제에 막대한 이익을 유발했다고 주장한다. 국내 경제문제를 외국인을 활용해 해결하는 방식인 셈이다. 이탈리아가 보여주는 발상의 전환이 지속성 있는 해결책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2024.05.28 00:24

  • [글로벌 아이] 미 하원의장의 ‘굴욕’…한국 국회의장은

    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미국 하원에서 ‘초유의’란 수식어가 과언이 아닌 일들이 곧잘 벌어지고 있다. 지난 8일도 그랬다.   야당인 공화당 내 극우 강경파 마조리 테일러 그린 의원은 같은 당 소속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의 해임안 표결을 요구했다. 존슨 의장이 여당인 민주당과 손잡고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안과 2024 회계연도 본예산안 처리를 주도한 게 불만을 샀다.   미국 하원의장 해임결의안 관련 본회의 투표를 하루 앞둔 지난 7일 기자회견에 나선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 [AP=연합뉴스] 벼랑 끝에 몰린 존슨 의장을 구한 건 상대 정당인 민주당이다. 그린 의원이 낸 의장 해임안을 ‘보류(table) 또는 폐기(kill)’하는 안이 스티브 스컬리스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 주도로 상정됐는데 찬성 359표, 반대 43표로 가결됐다. 공화당(총 217석) 내 일부 강경파를 제외한 196명이 찬성하고 민주당(총 213석)에서도 압도적 다수인 163명이 의장 구제안에 찬성표를 던진 결과다. 같은 당 소속 하원의장을 끌어내리려 하고 상대 당이 엄호하는 모습은 피아(彼我)가 뒤바뀐 듯한 초현실적 풍경이다.   이런 ‘내부 반란’이 처음도 아니다. ‘미수’에 그치지 않고 ‘실현’까지 됐었다. 존슨 의장의 전임자인 케빈 매카시(공화당) 전 하원의장은 지난해 10월 공화당 내 또 다른 극우 강경파 맷 게이츠 의원이 임시예산안 처리를 문제삼아 제출한 해임안이 가결되면서 재임 9개월 만에 하차했다. 234년 미 의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 하원의장은 대통령, 부통령에 이어 의전 서열 3위로 미 의회 전체를 사실상 대표한다. 그런 하원의장이 공화당 내 10%에 불과한 강경파에 휘둘리며 굴욕을 겪고 있다.   비슷한 광경이 한국 여의도에서도 벌어지는 듯하다. 더불어민주당 박병석 전 국회의장은 3년 전 언론중재법 처리가 무산되자 같은 당 김승원 의원에게서 ‘GSGG’라는 험한 말을 듣더니 최근 같은 당 출신 김진표 의장은 ‘채 상병 특검법’ 처리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역시 같은 당 중진 박지원 당선자로부터 “진짜 개××”라는 욕설을 들었다.   민주당의 차기 국회의장 후보 경선에서 우원식 의원이 강경 성향의 추미애 당선자를 꺾자 일부 당원들의 탈당 행렬과 문자폭탄이 이어지고 당원 게시판에는 ‘우원식 지지 의원 색출론’이 나왔다고 한다. 당론과 입장이 다르다고 육두문자를 퍼붓고 양심과 소신에 따른 투표 결과를 겁박하듯 대하는 건 민주주의라기보다 전체주의적이다. 다름을 수용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대전제 아닌가. 미 하원의장이 겪은 수모를 한국 국회의장도 경험하게 될 날이 머지않은 듯해 씁쓸하다.     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2024.05.24 00:27

  • [글로벌 아이] 내겐 너무 어려운 나라

    이영희 도쿄특파원 얼마 전 일본의 한 기관에 취재 신청을 했다가 ‘열이 확 오르는’ 답 메일을 받았다. 때는 화요일, “이러저러한 일로 취재를 하고 싶은데, 급하긴 하지만 혹시 이번 주 내 방문이 가능하겠느냐”했더니 표현은 한없이 예의 바른, 하지만 해석컨데 이런 내용의 답이 돌아왔다. “최소 10일에서 2주 이전 취재 신청을 해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취재할지 정식의뢰서도 보내라. 너희들(한국 언론)은 이런 식으로 일을 하느냐.” 잠시 멍해졌다 다시 메일을 썼다. “급작스러운 요청에 대해선 사과한다. 하지만 한국 언론에 대한 언급은 과도한 것 같다.” 그러자 돌아온 긴 답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허나 역시 취재엔 응하지 못하겠다.”   이데자와 다케시(出澤剛) 일본 라인야후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8일 결산설명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일본에서 일한 3년 반의 시간은 이런 종류의 ‘벽’에 계속 부딪히는 일이었다. 무엇이든 빨리 결정되지 않는, 느리디느린 속도에는 적응할 수밖에 없다 치자. 지극히 예의를 갖춘 듯한 말 속에 ‘칼’이 들어있고, ‘이건 아니잖아’ 항변하면 ‘자 문구를 꼼꼼히 봐라. 네가 오해한 거다’라고 한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너도 알고 나도 알지만 인정하지 않고 정해진 대사만 반복한다. 성미 급한 외국인은 그때마다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 그게 그거잖아!”   특파원 생활을 마지막까지 바쁘게 만든 ‘라인야후’ 사태를 보면서도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총무성이 행정지도에 적은 ‘자본 관계 재검토’는 ‘네이버의 지분을 사들여 소프트뱅크가 최대 주주가 되는 것’을 의미함을 일본 정부도, 라인야후도, 일반인도 다 아는데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럼 무슨 뜻인지 물으면 “알아서 해석해야지” 한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도 똑같은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2019년 일본은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에 반도체 분야에 대한 수출 규제를 강화했다. 역사 문제에 경제 보복은 부당하다는 비판이 일자 “징용문제와 수출관리는 별개”라는, 발언자조차 믿지 않는 주장을 끝까지 이어갔다.   특파원으로 일하는 동안 한·일 관계는 ‘개선’되는 듯 보였다. 도쿄 길목을 돌 때마다 들려오는 한국어는 변화를 실감하게 만들었다. 그 변화라는 게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준 것이 ‘라인야후’ 사태다. 일본 외교 관련 인사들에게 “한국은 한·일 관계를 위해 이것저것 하는데 왜 일본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느냐”고 물으면 “(한국) 정권이 바뀌면 또 달라질 게 분명하니 움직이기 곤란하다”고 한다. 한국은 꿈쩍 않는 일본이, 일본은 자꾸 달라지는 한국이 상대하기 어렵다. 이렇게 어려운 이웃과 평화롭게 동행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거대한 숙제를 안고 돌아가는 느낌이다.     이영희 도쿄 특파원

    2024.05.21 00:26

  • [글로벌 아이] 신소련과 신중국의 연대

    신경진 베이징총국장 블라디미르 푸틴(72) 러시아 대통령이 16일 베이징을 찾았다. 지난 7일 다섯 번째 취임식 아흐레만이다. 지난해 3월 20일에는 시진핑(習近平·71) 중국 국가주석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3연임 열흘만이었다. 푸틴이 하루 더 서둘렀다. 중·러 국력 차이를 보여준다.   푸틴의 행보에는 고도의 셈법이 담겨있다. 올해 선거일 택일이 심상치 않았다. 대선일이던 3월 17일은 지난 1991년 구소련 연방의 유일한 국민투표가 치러졌던 날이다. 33년 전 국민투표는 “모든 민족의 개인 권리와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는 주권 공화국들의 평등하고 새로운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을 유지하겠는가”라며 연방 존속을 물었다. 80%의 투표율, 77.8% 찬성률을 기록했다.   1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광장에서 시진핑(왼쪽)·푸틴 중·러 양국 정상이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하지만 그해 12월 8일 벨라루스·러시아·우크라이나 세 공화국 수뇌가 비밀회의로 연방 해체를 결정했다. 소련은 그렇게 무너졌다. 푸틴은 5연임을 33년 전 국민투표와 시공을 초월해 연결했다. 푸틴 5기가 구소련 국민이 유지를 찬성했던 ‘신소련’인 이유다.   푸틴은 지난 3월 18일 당선 기자회견에서 대만을 말했다. “대만은 의심할 바 없이 중국의 불가분 일부”라며 “대만 주변에서의 어떠한 도발·제재도 철저히 실패할 것”이라고 했다. 푸틴의 발언은 이번 임기 6년 중 베이징이 대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결심을 내릴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서 나왔다. 대만 언론인 황궈량(黃國樑)의 최근 분석이다.   푸틴의 대만 발언은 줄곧 우크라이나와 연결되어 있었다. 침공 넉 달 전이던 2021년 10월 미국 CNBC 대담에서 “중국은 대만과 통일 목표를 실현하려 한다. 무력을 쓸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 무렵 푸틴은 “우크라이나 동부는 러시아 여황제 예카테리나 대제가 17세기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정복한 땅”이라며 “사실상 러시아 소유”라고 주장했다.   굳건했던 푸틴과 시의 밀월은 러·우 전쟁 발발로 잠시 흔들렸다. 개전 7개월이 지난 2022년 9월 15일 사마르칸트 회담 모두에 푸틴은 “당신의 문제와 우려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회담이 끝난 뒤 시는 “중·러는 핵심이익 문제에서 서로를 지지한다”고 했다. 문제와 우려를 풀었다. 대만과 우크라이나 협력 개연성이 있다. 회담 후 푸틴은 우크라이나 동부 4개 주를 러시아에 가입시키는 국민투표를 치렀다. 90% 지지로 영토에 편입했다.   중국은 미국 대선보다 앞서 20기 3중전회를 소집했다. 새로운 개혁개방이 선언될 전망이다. 신소련과 신중국의 연대가 탈냉전 질서를 본격적으로 흔들기 시작했다.     신경진 베이징 총국장

    2024.05.17 00:22

  • [글로벌 아이] 팔로우업 퀘스천

    김필규 워싱턴특파원 특검 보고서에서 당신을 ‘기억력 나쁜 노인’이라고 표현했는데? “나는 대통령으로서 내가 뭘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당신의 기억력은 얼마나 안 좋은 것인가? 대통령직을 계속 수행할 순 있나? “당신이 질문하도록 내버려 둘 만큼 기억력이 안 좋은 것 같긴 하다.”   지난 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선 윤석열 대통령 취임 2주년 기자회견이 열렸다. [뉴스1] 석 달 전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폭스뉴스 기자와 조 바이든 대통령 간에 오간 질의응답이다.   기자는 불편한 질문을 연거푸 던졌고, 대통령도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모든 질문에 답을 했다.   백악관 회견장에선 이런 후속 질문(Follow-up Questions)이 일반적이다. 상대가 대변인이든, 국가안보 보좌관이든, 대통령이든 마찬가지다.   손 치켜들고 차례 기다리던 다른 기자들도 동료가 후속 질문 들어가면 끝날 때까지 기다려준다. 또 질문 하냐며 불평하거나 핀잔 주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한번 받은 질문권은 보통 후속 질문 2~3개까지 포함한 패키지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그래야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질문의 ‘빌드업’을 통해 원하는 답을 얻을 수도 있다.   질문의 주제를 한정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지난달 11일 미·일 정상회담 후 열린 합동 기자회견에서 바이든 대통령에게 나온 첫 질문은 ‘고물가 대책’이었다. 남의 나라 정상을 세워두고 뭐하는 짓인가 싶지만, 이를 문제 삼거나 간섭하는 백악관 직원은 없다. 이래야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짧은 시간에 가장 뜨거운 현안에 대한 입장을 들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답하는 사람 역시 이 정도면 그냥 넘어갈 법한데 곧이곧대로 답을 한다. 그만큼 잘 준비됐고, 그래서 밀리지 않는다는 일종의 메시지다.   이런 문화에 익숙할 외신 기자들이 지난 9일 윤석열 대통령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느꼈을 실망은 이해가 간다.   ‘북·러 군사협력을 어디까지 용인할 것이냐’는 질문에 ‘러시아는 오랜 세월 우리와 좋은 관계를 맺었다’는 정도의 답변을 들은 BBC 서울 특파원은 “(윤 대통령이) 사실상 내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날 회견에선 동문서답이 여러 번 반복됐다. 4개 분야를 기계적으로 나눠 진행한 탓에 정말 궁금한 현안에 대해선 충분히 질문할 수 없었다.   후속 질문이 가능했다면, 질문 분야를 한정하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아쉬움이다.   회견을 끝내며 “앞으로 이런 기회 더 자주 만들겠다”고 했으니, 다음은 진일보한 기자회견을 기대해본다.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2024.05.14 00:22

  • [글로벌 아이] 사라지지 않는 장소

    김현예 도쿄 특파원 재즈밴드에서 기타 연주를 하던 대학생 시절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그것도 예술에 기술을 더한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될 줄 말이다. 마에바야시 아키쓰구(59) 일본 정보과학예술대학원대학 교수다. 그는 군마현에 의해 최근 산산조각 나 사라진 군마의 숲 조선인 추도비를 되살려냈다. 소생 방법은 이렇다. 우선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로 앱을 내려받는다. 원래 추도비가 있던 군마의 숲 자리로 가서 앱을 실행해 비추면 추도비가 예전 모습 그대로 떠오른다. ‘증강현실(AR) 조선인 추도비’다. 그는 왜, 이런 앱을 만들었을까. 지난 8일 저녁, 줌으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난 2월 일본 군마현 군마의 숲에서 조선인 추도비 철거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연합뉴스] “군마의 숲에 추도비가 있다는 건 ‘정보’로는 알았어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철거가 이뤄진 것이 이 아이디어를 내게 된 큰 계기였어요.” 2004년 시민들의 손으로 군마의 숲에 세워졌던 비석을 군마현이 지난 1월 말 중장비로 부서뜨린 뒤, 그는 뭔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술을 사용해보자’는 생각에 알고 지내던 작가, 교수들과 상의를 해나갔다. 이미 무너지고 없는 추도비. 인터넷에 널려있는 영상과 사진들이 원재료가 됐다. 그는 AR 기술로 재현해내는 사람들을 찾아냈고, 사비를 들여 이번 추도비 앱을 내놨다.   사실 기술적으로만 보면 앱을 사용해 추도비를 집 안 거실에서도 세워볼 수도 있고, 거리에서도 세워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에바야시 교수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군마의 숲’이라는 장소. “군마의 숲 조선인 추도비는 사라지고 없지만, 오랜 시간 추도비가 있던 장소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다”고 했다. 추도비 장소가 남아있는 한, 군마현이 추도비를 산산조각내더라도 추도비를 사람들의 기억에서 없애버릴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은 셈이다.   20년 전, 시민단체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군마의 광산, 군수공장에 동원됐던 조선인 노동자들을 기리기 위해 비를 세웠다.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라는 문구도 새겨넣었다. 부의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어야 두 나라의 우정이 싹틀 수 있다는 염원을 담았다. 일본 전역에 있는 조선인을 위한 비는 약 150개. 이렇게 강제로 철거된 비는 군마의 숲 추도비가 유일하다.   이르면 오는 6월 야마모토 이치타 군마현지사와 윤덕민 주일 한국대사의 만남이 이뤄질 전망이다. 이른바 외교의 시간이다. 마에바야시 교수의 말은 기억해주길 바란다. “사람이 만든 물건은 사라져도, 그것이 있던 장소와 기억까지 지울 수는 없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2024.05.10 00:22

  • [글로벌 아이] “부끄러운 줄 알라”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지난달 30일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학교의 상징 해밀턴홀을 점거하던 친(親)팔레스타인 시위대 100여 명이 교내에 진입한 경찰에 체포됐다. 그리고 줄줄이 손이 뒤로 묶인 채 한참동안 ‘본보기’처럼 서 있다가 호송 버스에 올랐다.   하늘에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학생들과 많은 시민들은 빗속에서도 “부끄러운 줄 알라(shame on you)”는 구호를 외쳤다. 경찰의 표정도 어두웠다. 현장에서 만난 중년 남성에게 말을 걸었다. 컬럼비아대 교수였다. 그는 “평생 자유를 가르쳤는데 너무 참담하다”고 했다. “이건 내가 아는 미국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그는 다음날 다른 교수들과 함께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지난달 30일 컬럼비아대 친팔레스타인 시위대가 학교로 진입한 경찰에 체포되고 있다. [AFP=연합뉴스] 미국 수정헌법 1조엔 “발언의 자유를 저해하거나, 출판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의 권리, 정부에 탄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돼 있다. 중년의 교수가 가르쳐 왔다는 미국의 정체성을 규정한 대목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학교측이 시위자에 대한 퇴학 방침을 밝히자 학생들은 얼굴을 가렸고, “신원이 드러나면 졸업할 수 없게 된다”며 입까지 닫았다.   어렵게 성사된 인터뷰 도중엔 전통 의상을 입은 유대인 학생들이 몰려와 채증(採證)하듯 셔터를 눌러댔다. 국회의원의 입을 강제로 틀어 막고 사지를 들어 끌어내는 장면은 없었지만, 이를 보고 있자니 ‘입틀막’ 논란이 떠올랐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를 35번 반복했다. 경계 대상으론 ‘반(反)지성주의’를 들었다. 공정을 내세우며 출범한 정부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운 소통과 지성을 갖춘 토론이 이뤄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지난달 26일 공개된 한국갤럽의 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2주 연속 20%대였다. 부정 평가의 이유는 경제·민생·물가(21%) 문제와 함께 소통 미흡(15%), 독단적·일방적(9%) 등 대통령의 태도와 관련된 요인이 상위권에 들었다. 이 상태라면 역대 대통령의 취임 2주년 지지율 가운데 최저 기록이 된다.   외부의 평가는 더 가혹하다. 지난 3일 공개된 국경없는기자회(RSF)의 ‘언론자유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62위를 기록했다. 지난 정부 때 순위는 내내 40위권 초반이었다. 이번 순위는 전쟁으로 자유가 제약될 수밖에 없는 우크라이나(61위)보다 낮다.   미국에선 그래도 학생들과 시민들이 공권력을 향해 ‘부끄러운 줄 알라’고 외쳤다. 한국의 정치도 최소한 부끄러운 줄은 알아야 한다.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2024.05.07 00:29

  • [글로벌 아이] 괄목상대 중국 전기차

    이도성 베이징 특파원 “여기부터 입장까지 30분”   베이징모터쇼에 첫 출사표를 던진 가전·휴대전화 제조업체 샤오미의 전시관 앞 팻말에 적힌 말이다. 첫 전기차 ‘SU7’을 직접 보기 위한 인파가 몰렸다. 레이쥔 회장이 직접 나선 발표회 현장은 시작 30분 전부터 만석이었다.   코로나19로 한 차례 취소됐던 베이징모터쇼가 지난달 25일 4년 만에 열렸다. 중국 전기차는 그야말로 괄목상대(刮目相對)다. 샤오미는 물론, 테슬라를 누르고 세계 1위로 우뚝 선 비야디(BYD), 유럽 자동차 브랜드를 연이어 인수한 지리 등 중국 업체들은 드높아진 인기를 안방에서 뽐냈다.   ‘값싼 중국산’ 이미지도 옛말이다. 세계 최초 공개된 고급 전기차 U7은 1287마력에 ‘제로백’이 2.9초밖에 되지 않는다. 유럽의 고가 자동차와 정면대결한다.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은 훙치와 니오, 둥펑 등도 신차를 공개하며 관심을 받았다.   지난달 25일 베이징모터쇼의 샤오미 전시관에서 레이쥔 회장이 SU7을 소개하고 있다. 이도성 기자 글로벌 업체들도 참전해 총성 없는 ‘전기차 전쟁’을 벌였다. ‘BBA(벤츠·BMW·아우디)’ 3대 업체는 물론 최고급 브랜드인 롤스로이스, 람보르기니까지 베이징을 찾았다. 이들에게 중국은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다. 지난해 전기차 841만 대가 팔린 중국은 전 세계 시장의 약 60%를 차지한다.   공급과 수요를 양손에 쥔 중국 전기차는 정부 지원까지 등에 업었다. 리창 국무원 총리는 모터쇼를 찾아 “중국 시장 진입 장벽을 계속해서 완화하고 국내외 기업에 차별 없는 환경을 조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현대차그룹도 전시관을 마련했다. 중국 시장을 겨냥한 고성능 전기차와 프리미엄 모델을 내놨다. 상황은 녹록지 않다. 현대차그룹은 한때 중국 내 점유율이 10%가 넘었지만, 현재 1%대로 추락했다. 매출액도 7년 만에 70% 넘게 줄었다. 자동차 업계를 취재하는 한 중국 매체 기자는 “디자인과 내구성 등 어느 방면에서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면서 “품질이 뛰어나다는 이미지는 있지만, 소비자의 구매 욕구를 자극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모터쇼에 직원 1200명을 보냈다고 한다. 연구개발 인력뿐 아니라 마케팅과 영업 담당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의 ‘전기차 굴기’를 목도하고 절치부심한다면 ‘아픈 손가락’인 중국 시장에서 다시 한번 고개를 들 수 있지 않을까.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중국은 여전히 매력적인 시장”이라며 “차별화된 제품으로 시장을 공략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도성 베이징 특파원

    2024.05.03 00:22

  • [글로벌 아이] 멕시코 대선의 핫 이슈, 물 부족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라틴아메리카의 강국 멕시코 정가에 보기 드문 인물들의 경쟁과 함께 새로운 화두가 등장하고 있다. 멕시코에선 오는 6월 2일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을 포함해 2만 명 넘는 선출직을 뽑는 총선거가 실시될 예정이다. 1824년 연방정부 수립 이후 가장 판이 큰 선거다. 그중에서도 단연 관심이 쏠리는 자리는 대통령직이다. 특히 올해는 멕시코 역사상 최초로 유력한 후보 두 사람 모두 60대 여성이라는 점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두 여성 정치인은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집권 좌파 국가재건운동(모르나)당의 후보인 클라우디아 셰인바움(62) 전 멕시코시티 시장과 우파 야당 연합체인 광역전선의 통합 후보 소치틀 갈베스(61) 전 상원의원. 이들은 비슷한 나이 외에도 이공계 출신이라는 점, 무엇보다 환경 문제에 적극적으로 맞서겠다는 공약 때문에 주목받고 있다.   오는 6월 멕시코 대선의 유력한 후보 셰인바움. [AFP=연합뉴스] 멕시코는 경제·마약·치안 등 복잡다단한 문제들로 골치를 앓고 있지만 고질적인 물 부족사태는 이제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어버렸다. 엘니뇨 현상으로 강수량이 줄어 십 년 넘게 계속된 가뭄은 현재 최악의 상태이다. 국토의 80%가 가뭄에 허덕이며 전국 저수지의 저수량은 40%대로 줄었고 주민들은 시도 때도 없는 단수에 고통받고 있다. 상황이 최악인 동남부 치아파스주 주민들은 세계에서 코카콜라를 가장 많이 마신다는 오명까지 얻었다. 마실 물이 부족하다 보니 주민들은 물 대신 지역 내 공장에서 생산하는 코카콜라로 갈증을 해소하며 심지어 아기에게도 콜라 젖병을 물린다고 한다. 끔찍한 일이다.   오는 6월 멕시코 대선의 유력한 후보 갈베즈. [EPA=연합뉴스] 이런 물 부족 사태에 대응하고자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공로로 2007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셰인바움 후보는 지속가능한 물 활용 30년 계획을 갖고 나왔다. 정부뿐 아니라 농업·산업·서비스업 등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인 액션을 취하겠다는 공약이다.   상대편의 갈베스 후보는 셰인바움의 집권당이 지난 6년간 물 부족 사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며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전국의 상수도망을 늘리고 기존의 파이프 누수 복구에 우선 힘쓰겠다고 발표했다.   1억2000만 인구의 절반이 안전한 물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는 멕시코. 두 후보가 내놓은 방안 모두 물 부족 사태를 이른 시일 내에 해결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누가 되든 멕시코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의 탄생이 임박했다는 사실. 수많은 남성이 해결하지 못했던 이 난제를 여성의 리더십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2024.04.30 00:22

  • 월 15만에 의사가 내 집 왔다, 그랬더니 '장수현' 된 나가노 [이영희의 나우 인 재팬]

    이영희 도쿄 특파원   일본 도쿄(東京)에서 신칸센으로 1시간 10분 정도 걸려 나가노(長野)현 가루이자와(軽井沢)역에 도착했다. 차로 15분 정도 더 가니 울창한 숲 사이로 목조 건물이 나타났다. 겉모습은 전원주택이나 펜션에 가깝지만, 실은 병원이다. 지난 2020년 창업해 이 지역에 새로운 의료 문화를 만들고 있는 ‘홋지노롯지(ほっちのロッヂ)’ 진료소다.   일본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 있는 '홋지노롯지' 진료소. 이영희 특파원   기자가 진료소를 방문한 지난 25일 아침, 진료 시작 전인데도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병원 내를 오가고 있었다. 내과·소아과 및 통증 완화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의료 시설이지만, 의사·간호사 가운을 입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진료를 받을 때 환자들이 느끼는 부담감을 줄이기 위해 가운을 입지 않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진료소 내부에는 커다란 거실과 부엌, 다양한 책이 꽂힌 도서관, 놀이기구가 쌓인 어린이용 공간이 있었다. 진찰은 2층 다락방에서 한다. 오전 9시가 되자 환자들이 연이어 도착하고 아이들은 놀이방에서, 어른들은 책을 읽으며 진료를 기다렸다.    진료소에는 의사 3명, 간호사가 5명 근무하지만 진료소 내 외래 진료는 월~토요일 오전에만 한다. 나머지 시간은 24시간 체제로 운영되는 방문 진료가 중심이다. 병원 인근 16km 이내에 살고 있는 150여 명의 재택 치료 환자들과 계약을 맺고 한 달에 2~3회 의사나 간호사가 집을 방문해 환자를 돌본다.    비용은 소득에 따라 달라진다. 개호보험이 적용되는 고령자의 경우 월 6700엔(약 5만 8000원)에서 1만8000엔(약 15만 6000원) 수준이다. 후지오카 사토코(藤岡聡子) 공동대표는 “방문 진료 환자는 병원을 왔다 갔다 하기엔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들이 대부분”이라며 “단순히 환자의 증세 뿐 아니라 생활 환경 등을 세심히 살피고 조언할 수 있다는 게 방문 진료의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 있는 '홋지노롯지' 진료소 내부. 거실과 주방, 아이들 놀이방 등을 갖췄다. 이영희 특파원   홋지노롯지는 마을 이름인 ‘홋지’의 ‘롯지(lodge, 산장·오두막)’라는 뜻이다. 병을 치료하는 곳만이 아니라 환자와 보호자, 주민들이 편하게 찾아와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커뮤니티의 역할을 함께 하고 있다. 인근 초등학교와 연계해 학생과 고령자가 교류하는 방과 후 교실을 열거나, 장애 아동들을 위한 데이 케어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후지오카 대표는 “환자라는 존재를 ‘증상’의 관점에서만 접근하지 않고, 다양한 요소를 함께 공유하며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우리의 활동”이라고 말했다.    지난 4년 간 홋지노롯지를 찾은 환자는 4000여명으로, 가루이자와 주민 5명 중 1명이 이용한 셈이다. 이런 진료소의 활동을 인정받아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지역 고령자케어 이노베이션 어워드’에서 일본 병원이나 단체로는 처음으로 사회참여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  재택 의료 힘입어 ‘장수현’ 된 나가노   홋지노롯지가 있는 나가노현은 수십 년 전부터 재택 의료의 문화가 자리 잡은 지역이다. 산이 많고 교통이 불편한 여건 때문에 의사나 간호사가 집에 머무는 환자들을 찾아가는 시스템이 일찌감치 정착될 수 있었다. 1945년 사쿠(佐久)시에 있는 사쿠종합병원에 부임한 와카쓰키 도시카즈(若月俊一·1910~2006)가 선구자로 꼽힌다. 그는 ‘예방은 치료를 이긴다’는 신념에 따라 농촌 지역 환자와의 사전 접촉 및 대규모 검진을 통한 예방·치료 통합형 진료를 도입했다.    일본 나가노현 사쿠시에 있는 사쿠종합병원. 나가노현 재택 의료의 전통이 시작된 곳이다. 이영희 특파원   이를 계기로 나가노현의 여러 병원들이 왕진과 간병을 포함하는 방문 진료에 나섰다. 후생노동성이 2022년 공표한 2020년 의료시설 실태조사에 따르면 나가노현에서 방문 진료를 하는 의료 기관의 비율은 30%로, 도쿄(13.5%), 오사카(大阪·25%) 등보다 크게 높다. 특히 말기암 환자 등에 대한 재택 완화 치료를 하는 의료기관 비율이 10%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의료 시스템이 나가노현을 ‘장수(長壽)현’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나가노현은 1970년대까지는 일본 내 장수현 순위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90년대부터는 늘 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지난 2020년 기준 일본인의 평균 수명은 남성 81.49세, 여성이 87.60세인데, 나가노현은 각각 82.68세, 88.23세였다. 47개 광역지자체 중 시가(滋賀)현에 이어 두번째 장수 지자체에 선정됐다.     ━  온라인 진료하고 약은 드론으로    OECD가 집계한 일본의 인구 1000명 당 의사수는 2.6명으로 한국과 거의 같다. 일본도 고령화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2008년부터 2023년도까지 매년 평균 110명씩 의대 정원을 늘렸다. 지방의 의사 부족 문제가 특히 심각해 특정 지역에서 진료할 것을 조건으로 하는 ‘지역 정원제’를 만들어 이 과정으로 뽑힌 학생들에게는 지자체나 대학이 장학금을 지원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후지오카 사토코(藤岡聡子) 홋지노롯지 공동대표. 홋지노롯지를 "환자와 주민들이 소통하고 삶의 질을 함께 높혀 가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영희 특파원   재택 진료 및 온라인 진료의 도입도 고령화 시대 의사 부족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일본은 코로나19 이후 온라인 진료 조건을 완화하고 진료 보수를 인상하면서 2022년 12월 기준 온라인 진료가 가능한 의료 기관의 비율이 16.1%까지 늘어났다. 의사 부족이 심각한 지방의 경우엔 온라인 진료가 훨씬 빨리 퍼지고 있다. 야마가타(山形)현이 전국 1위로 41.8%, 나가노현이 2위로 38.8%다.    나가노현 중에서도 산악 지역이 많은 이나(伊那)시의 경우, 지난해부터 오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온라인으로 원격 진료를 하고 드론으로 의약품을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일본 고령화 전문가인 김명중 닛세이기초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한국도 지방 의사 부족에 대응하기 일본 의대의 지역 정원 제도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면서 “IT기술을 활용한 온라인 진료를 확대하는 것도 지역 고령화에 따른 의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한번은 당했지만 두번은 안된다"...'방재도시' 거듭난 이곳 [이영희의 나우 인 재팬] 장기 집권과 파벌 정치가 낳은 日 자민당의 '검은 돈 연금술' [이영희의 나우 인 재팬] 거기선 차가 하늘 난다…제2 도약 시동 건 오사카 '18조원 꿈' [이영희의 나우 인 재팬] 일본판 '기생충' 매진, 뮤지컬 '빈센조'도 꽉찼다…K콘텐트 돌풍 [이영희의 나우 인 재팬]이영희 도쿄 특파원

    2024.04.29 00:24

  • [글로벌 아이] 워싱턴에서 조금씩 커지는 한국 핵무장론

    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어쩌면 핵무기의 한반도 재배치가 먼 미래의 일이 아닐지 모른다.’   리처드 롤리스 전 국방부 부차관,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엘브리지 콜비 전 국방부 전략·전력개발담당 부차관보 등 미국 내 손꼽히는 외교안보 전략통을 최근 인터뷰하면서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다.   이들은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이며 미 본토 공격 능력을 갖췄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미국이 제공하는 확장억제(핵우산)에만 의존하는 데 대한 한국 내 우려와 의문을 이해한다는 전제도 같다. 볼턴 전 보좌관은 “확장억제 능력이 가상이 아니라 바로 한국에 있다는 확신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고, 롤리스 전 부차관은 ‘나토식 핵 공유’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지난해 3월 28일자 북한 노동신문에서 공개된 전술 핵탄두 ‘화산-31’형. [노동신문=뉴스1]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재집권 시 유력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거론되는 콜비 전 부차관보의 경고는 더욱 극적이다. 미국이 대(對)중국 군사적 우위를 잃은 상황에서 “뒤처진 핵 균형을 위해 핵무기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지난해 4월 한·미 핵협의그룹(NCG) 신설을 골자로 한 ‘워싱턴선언’의 한계를 지적하며 미국이 자국의 도시를 북한의 핵공격에 희생하면서까지 한국 안보를 지켜줄 거라고 약속할 수는 없다고 한 대목은 오히려 솔직해서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사실 그는 5년 전만 해도 “한국의 핵무장에 반대한다”(2019년 VOA·미국의소리 인터뷰)고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간 북한의 거듭된 폭주에 지금은 “미국의 재래식 전력 지원에 대한 기대를 줄이고 직접 한반도를 방어해야 한다”며 한국의 자체 핵무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설파한다.   미국 정부의 공식 기조는 여전히 ‘한반도 비핵화’에 맞춰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달 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통화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공약’을 재확인했다. 한국 핵무장시 동아시아 핵확산의 시발점이 될 거란 우려도 미 조야(朝野)에 여전하다. 다만 금기시해 오던 한국 핵무장론이 ‘중국 견제’라는 대전제 속에 공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상황은 분명 심상치 않아 보인다.   비핵화의 길이 난망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한·미 군사동맹을 고도화하고 자주국방 역량 또한 획기적으로 강화해 확장억제 역량에 대한 의문을 불식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남북 물밑대화에도 계속 힘써 우발적 충돌을 미연에 막아야 한다. 북핵 문제는 손이 묶인 상황에서 손을 써야 하는 난제 중 난제가 됐다.     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2024.04.26 00:24

  • [글로벌 아이] ‘저축에서 투자로’ 일본의 변화

    이영희 도쿄특파원 『1시간에 마스터하는 신(新)NISA 교과서』, 『신NISA 완전공략: 월 5만엔으로 시작해 1억엔 만드는 법』….   얼마 전 도쿄(東京) 긴자의 한 서점을 찾았다가 신기한 광경을 봤다. 매장 한가운데 ‘신NISA’와 관련한 책이 수백 권 쌓여 있고, 많은 이들이 집중해서 책을 고르고 있었다. NISA란 ‘Nippon Individual Saving Account’의 준말로 정부가 소액 주식투자자에 제공하는 비과세제도를 말한다. 서점 풍경이 말해주듯, 요즘 일본 금융 시장의 최고 히트 상품이 바로 신NISA다.   2014년 시작된 제도가 올해 유독 관심을 모으게 된 건, 정부의 과감한 개혁 때문이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2022년 11월 발표한 ‘자산소득 배증 플랜’에서 국민의 노후 자산을 2배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하며 투자 촉진 프로그램 NISA의 개편을 결정했다. 올해부터 시행된 신NISA는 연간 납입 한도가 기존 120만 엔에서 360만 엔으로, 총납입액은 최대 800만 엔에서 1800만 엔으로 크게 늘었다. 비과세 기간은 최장 20년에서 무기한으로 바뀌었다. 투자 대상도 일본 기업 주식과 ETF는 물론 미국 등 글로벌 주식까지 모두 가능하다.   일본 도쿄 니혼바시에 있는 도쿄증권거래소. 뭐든 더디게 움직이는 일본이지만 이번에는 결단도, 반응도 빨랐다. 지난해 말 기준 NISA 계좌수는 총 2263만 개였는데 올해 1~3월 사이에만 170만 개의 신규 계좌가 만들어졌다. 전년 동기 계좌개설 건수의 3배다. 특히 젊은 층, 여성들의 가입이 늘었다. 자금 유입액도 4조7000억 엔으로 전년 같은 기간의 약 3배다. NISA로 투자하는 대상은 미국 주식 등 글로벌 포트폴리오가 많지만, 올해 들어서는 신규 투자금의 약 절반 정도가 일본 주식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NISA는 일본 사회 분위기까지 바꾸고 있다. 이번에 처음 신NISA 계좌로 주식투자를 시작했다는 30대 회사원 친구는 “계좌에 찍히는 돈이 늘어나는 걸 보니 일본이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웃었다. 농반진반으로 “NISA 개편은 기시다 총리의 최대 업적 같다”고도 했다. 지난달 만난 이와나가 모리유키(岩永守幸) 도쿄증권거래소 사장은 “일본 주식시장 활황이 계속될 수 있겠냐”는 질문에 “일본인은 이제야 막 저축에서 투자로 돌아섰다. 변화는 큰 물결이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한국 정부가 개인 투자 활성화를 위해 만든 ISA(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 계좌의 경우, 비과세 한도 등 여러 측면에서 아직은 ‘반쪽짜리’라는 평가를 받는다. NISA의 성공 사례를 세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영희 도쿄 특파원

    2024.04.23 00:26

  • [글로벌 아이] 차이나 쇼크 2.0

    신경진 베이징총국장 지난 한 달 동안 베이징 외에 상하이·자싱·시안·허페이와 대만의 타이베이·화롄 등 6~7개 도시를 오가며 달라진 중국을 체감했다. 시 정부가 글로벌 투자 은행사 못지않게 디스플레이·반도체·전기차 선두 기업에 거액을 투자해 해당 산업 체인을 유치한 ‘허페이 모델’을 현장에서 확인했다.   당(唐)나라 의상 대여점이 성업 중인 시안의 대당불야성(大唐不夜城)에서는 ‘새로운 중국 스타일 플러스(新中式+)’로 불리는 복고주의 열풍을 목격했다. 대만에서는 화롄 대지진 취재 틈틈이 2030년대까지 1나노급 첨단 파운드리 양산 로드맵에 따른 촘촘한 북부·중부·남부 반도체 단지의 조성 계획을 귀동냥했다.   지난달 23일 밤 시안시 대당불야성에 당나라 전통복장 사진을 촬영하는 중국인이 가득하다. 신경진 특파원 베이징에서는 샤오미(小米)의 전기차 SU7(Speed Ultra 7) 체험도 했다. 전 세계를 공습하고 있는 C커머스의 대표주자 테무(TEMU)의 초저가 시스템도 취재했다. 모두 ‘차이나 쇼크 2.0’이란 표현이 걸맞은 격변의 현장이다.   한국이 총선에 몰입했던 한 달간 미국·중국·유럽은 ‘차이나 쇼크 2.0’을 둘러싼 신(新) 삼국지를 펼쳤다. 먼저 미국. 재신(財神)으로 불리는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이 8일 베이징 회견에서 ‘차이나 쇼크 2.0’을 말했다. “인위적으로 값싼 중국산 제품이 세계 시장에 홍수를 이룰 때, 미국과 다른 외국 기업의 생존 가능성이 의문시된다”며 전기차·리튬배터리·태양광의 과잉생산을 우려했다. 그는 “10여 년 전 중국 정부의 막대한 지원으로 저가의 중국산 철강이 세계 시장에 범람하면서 전 세계 산업이 쇠퇴했던 현실을 다시 용납하지 않겠다”며 날을 세웠다.   중국은 유럽의 독일 총리를 환대해 반격했다. 16일 시진핑 국가주석은 올라프 숄츠 총리와 회담에서 “중국의 전기차·배터리·태양광 수출은 글로벌 공급을 풍부하게 할 뿐 아니라, 세계 인플레이션 압력을 완화한다”며 “세계가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녹색 저탄소로 전환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한다”고 과잉생산을 방어했다. 그러나 숄츠 총리는 이견을 숨기지 않았다. 이날 회견에서 “과잉생산을 논의했다”며 “모든 경쟁보조금은 등록돼야 한다”고 했다.   일본도 대비에 나섰다. 다루미 히데오(垂秀夫) 직전 중국대사는 최근 회고록에서 “거대한 중국시장에 진출하는 ‘공격’을 하는 과정에서, 단단히 겨드랑이를 조이는 ‘수비’를 굳혀야 한다”며 “공수양면에 전략적 사고를 갖고 중국에서 비즈니스를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이나 쇼크 2.0’은 세계 모두에 양날의 칼이다. “셰셰(謝謝)” 이상의 치밀한 공수전략이 시급하다.     신경진 베이징 총국장

    2024.04.19 00:16

  • [글로벌 아이] 록펠러센터와 US스틸

    김필규 워싱턴특파원 #1989년 10월 31일 뉴욕타임스 1면에 ‘일본인, 뉴욕의 상징을 사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맨해튼 한복판의 록펠러센터를 일본 기업 미쓰비시가 사들였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역사기념물로도 지정된 이 건물의 매각이 준 충격은 상당했다. 입주해 있던 GE와 NBC 방송 등 유수의 미국 기업들이 한순간에 일본의 세입자가 된 점마저 못마땅해했다.   소니가 컬럼비아 영화사를 인수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반일감정으로까지 번졌다. 지금은 할리우드 영화의 빌런(악당)이 대부분 러시아인, 중국인이지만 당시엔 일본인 재벌이나 야쿠자였다. 의회에서도 일본 자본의 투자를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지난 10일 미국 백악관 국빈만찬에서 건배를 하고 있는 조 바이든 대통령(왼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0일 백악관 미·일 정상회담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 반대 의사를 재확인했다. “노동자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였다.   피츠버그에 본사를 둔 US스틸은 1901년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카네기스틸과 합병해 세워졌다. 한때 시가총액 세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노조는 차라리 미국 회사인 클리블랜드 클리프스가 새 주인이 되길 바랐지만, 반독점법에 걸려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바이든 대통령은 “한 세기 이상 미국 철강산업의 상징이던 US스틸을 미국 회사로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뜻 보면 지난 30여 년간 상황은 별로 바뀐 게 없는 것 같다. 자유 시장경제라면서 경제 논리와는 안 맞는 이유로 여전히 거래가 막혔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난주 만난 한 전직 미국 관료는 록펠러센터 매입 때와 지금의 일본은, 미국에 전혀 다른 나라라고 말했다. 바이든도 선거를 앞두고 노동자 표를 의식해 그런 것이지, 연말 이후 US스틸 합병 작업은 급물살을 탈 거라고 봤다.   게다가 일본이 미·영·호주의 군사 동맹인 ‘오커스’ 협력국이 된 마당에 안보를 핑계로 보호주의를 할 명분도 사라졌다.   실제 정상회담 직후, US스틸은 주주총회를 열고 일본제철과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의 심사가 남았지만, 동맹국과의 거래를 막은 사례는 거의 없었다.   벌써 일본은 이런 지위를 백분 활용하는 모습이다. 얼마 전 미국 항만의 중국산 크레인을 모두 교체하기 위한 200억 달러(약 27조원) 규모의 계약을 따간 것도 일본 미쓰이였다.   30여 년 전 ‘엔화를 앞세운 침략자’였던 일본은, 이제 중국이란 더 큰 빌런에 함께 맞서는 동맹군으로 미국 시장에 다시 스며들고 있다.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2024.04.16 00:22

  • 벤처투자자 변신한 中지방정부…AI 정조준한 '허페이 모델'[신경진의 차이나는 차이나]

    신경진 베이징총국장 지난달 28일 중국 안후이(安徽)성 허페이(合肥)시 스피치밸리(聲谷)에 자리한 음성인식 인공지능(AI) 대표 기업 아이플라이텍(iFlytek)을 방문했다. AI 체험관의 안내원이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귀여운 대형 트럭을 그려주세요”라고 말하자 생성형 AI 인지모델 서비스 스파크(Spark)는 날개 달린 트럭을 그려냈다. 지난해 5월 미국 오픈 AI사의 챗 GPT와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스파크는 텍스트와 그림 생성, 수학과 논리적 추론, 컴퓨터 코딩 등 다양한 기능을 지녔다.   지난달 28일 찾아간 안후이성 허페이시의 폭스바겐 안후이 전기차 생산 라인의 기계가 전기차를 조립하고 있다. 허페이=신경진 특파원 중국 최대 음성인식 AI 기업 아이플라이텍이 서비스 중인 생성형 인공지능 서비스 스파크가 그린 하늘을 나는 트럭. 허페이=신경진 특파원 아이플라이텍은 지난 1999년 중국의 '칼텍'(Caltech)으로 불리는 허페이 중국과학기술대학(USTC)의 박사생이었던 류칭펑(劉慶峰·51)이 교내 벤처로 창업한 곳이다. 1층 전시실엔 사람 귀에 안 들리는 초음파를 이용해 석유화학단지의 안전사고를 예방하는 장치, 네 발로 움직이는 음성탐지 로봇 등 다양한 AI 제품이 있었다. 중국 최대 음성인식 AI 기업 아이플라이텍이 개발한 AI 교통관제 서비스. 시내 교차로 신호를 AI로 통제 전후의 차량 정체 시간을 그래프로 표시했다. 허페이=신경진 특파원   AI 전자칠판의 경우 중국 5만여 개 학교, 1억3000만명의 학생이 이용 중이라고 아이플라이텍 측은 소개했다. AI를 통해 허페이 전역의 교차로 신호를 통제해 차량 정체의 완화를 돕는 교통 슈퍼 브레인 서비스도 소개됐다.   지난달 28일 찾아간 안후이성 허페이시의 폭스바겐 안후이 전기차 생산 공장 관계자가 “중국에서 중국을 위해”라는 전략을 소개하고 있다. 허페이=신경진 특파원 허페이엔 전기차 공장도 있다. 지난해 전기차 생산량은 74만6000대로, 독일 폭스바겐도 진출해 있다. 이날 찾아간 폭스바겐의 이노베이션 허브에선 가상 3D 모델링 장비를 활용해 중국 내수 전용 신차를 개발하고 있었다. 어윈 가바르디 폭스바겐 안후이 최고경영자(CEO)는 “2030년 중국 전기차 시장 3위를 목표로 ‘중국 안에서 중국을 위해(In China For China)’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박경민 기자    ━  市정부가 투자로 기업유치   한국인에겐 '명판관 포청천'으로 알려진 포증(包拯)의 고향이자 리커창(李克强) 전 총리의 고향인 허페이는 AI·양자컴퓨팅·핵융합·바이오테크·전기차·태양광·배터리 등 각종 미래 산업의 전진기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야심 찬 이름이 붙은 '퀀텀대로'에는 20개 이상의 양자 전문 기업이 양자 컴퓨팅 공급망을 갖추고 있다. 중앙일보는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 기자들과 함께 지난달 말 중국 국무원신문판공실과 안후이성 정부의 초청을 받아 허페이시의 첨단기업을 방문하고 관계자들을 인터뷰했다.   인구 985만 명인 허페이의 지난해 성장률은 5.8%로 전국 평균(5.2%)을 웃돌았다. 한때 낙후 지역으로 여겨졌던 허페이의 주민은 이제 첨단 산업단지를 기반으로 중국 도시 평균을 훌쩍 넘는 소득을 누리고 있다.(표) 신재민 기자   허페이의 도약은 지방 정부의 과감한 투자와 민간 기업의 결합을 토대로 했다. 이같은 허페이 모델을 두고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최고의 국가 자본주의'라고 평가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2008년 LCD 제조사 징둥팡(京東方, BOE) 투자였다. 지방 재정 수입이 160억 위안(약 3조원)에 불과한 허페이는 당시 90억 위안(1.7조원)의 자금과 토지·에너지·대출 이자 보조 등을 제공하는 우대 정책 등으로 총 175억 위안(3.3조원)을 BOE에 투자했다. 이 결과 중국 최초로 LCD 패널 6세대 생산 라인을 구축했다. 허페이시는 투자 자금을 모으기 위해 지하철 건설까지 연기했다.   2017년 DRAM 제조사 창신메모리(長鑫存儲) 설립을 위해 지분을 투자했고, 2020년엔 전기차 업체 니오(NIO)에 70억 위안(약 1.3조원)을 투자했다. 허페이시의 지원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니오는 본사와 공장 일부를 허페이로 옮겼다. 2년 만에 니오가 경영난을 극복하자 주가가 급등했고 시 정부는 투자금의 5.5배를 회수했다. BOE와 니오에 투자한 기금 '허페이젠터우(建投)'는 2019년부터 2021년까지 매년 50억 위안(9528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다른 대도시가 학교 지원과 주택 보급에 힘쓸 때 허페이는 유망 기업에 투자한 것이다. 허페이가 ‘벤처투자자 지방정부’라고 불리는 이유다. 뤄원산(羅文杉) 안후이성 공업정보화 부청장은 “전문가팀이 산업을 면밀하게 연구하고, 허페이의 기반 기술을 점검한 뒤 전문 기관과 협의해 투자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1990년대 중국의 노동력과 외국 자본을 결합한 선전(深圳) 모델이 중국 남부를 세계의 공장으로 바꿨다면 허페이 모델은 산업 고도화를 원하는 도시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지난달 29일 중국의 전기차 배터리 기업인 궈쉬안(國軒) 허페이 공장 관계자가 배터리 생산 라인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허페이=신경진 특파원    ━  과기대 기반 중국판 실리콘밸리   미 스탠퍼드대학을 배경으로 미국 실리콘밸리의 글로벌 정보통신(IT) 기업이 탄생한 것처럼, 허페이 모델의 중심엔 중국 과기대가 있다. 문화대혁명(1966~76년) 당시 학자를 탄압하던 분위기에서 베이징에 있던 과기대가 1970년 허페이로 옮겨왔다.    50여년이 지난 지금 과기대는 첨단 기술의 허브로 탈바꿈했다. 과기대 물리학 연구소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핵융합 에너지 원자로 중 하나인 실험용 첨단 초전도 용기 토카막(Tokamak)을 테스트하고 있다.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CRISPR)를 사용한 최초의 인간 실험도 2015년 허페이 병원에서 이뤄졌다.   지난 2020년 허페이는 ‘체인 보스(Chain Boss)’ 시스템을 도입했다. 시 정부가 반도체, 양자과학, 전기차, 생명공학 등 12개 첨단 산업별 기업 체인을 만들고, 각 체인에는 큰 그림을 그리고 감독하는 정부 관료를 배치했다. 우아이화(虞愛華) 당서기가 직접 집적회로 체인 보스를 맡았고 시장이 디스플레이 체인을 맡아 챙겼다.    ━  범용 AI 혁신 발전 행동 시작   올해 허페이는 리창(李强) 총리가 정부 업무보고에서 밝힌 ‘AI 플러스 이니셔티브’의 시범 도시로 나섰다. 지난 1월 뤄윈펑(羅雲峰) 시장은 업무보고에서 올해 6% 성장을 목표로 제시하면서 “신형 네트워크 인프라 개선을 가속화하고, 하이퍼 컴퓨팅 센터를 구축하며, 스파크 대형인지 모델의 핵심 기술 난관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아이플라이텍이 입주한 스피치밸리를 중국을 대표하는 소프트웨어 파크로 육성하겠다는 계획도 소개했다.   류칭펑 아이플라이텍 대표. 차이신 캡처 남대엽 계명대 교수는 중국의 AI 플러스 정책에 대해 “미국이 주도하는 하드웨어 봉쇄망을 AI 소프트웨어를 활용한 산업 고도화로 돌파하겠다는 전략”이라며 “첨단 산업을 지분 투자로 유치하는 허페이 모델은 중국과 경쟁 산업이 겹치는 한국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허페이=신경진 기자 shin.kyungjin@joongang.co.kr

    2024.04.15 00:24

  • [글로벌 아이] 어떤 아름다운 ‘취미’

    김현예 도쿄 특파원 “당신은 왜 제 그림을 238점이나 사는 겁니까?” 화가가 물었다. 남자가 답했다. “당신은 산다, 판다고 말하지만 당신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일본인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신 작품을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맡겨두는 것일 뿐입니다.” 귀 기울여 듣던 화가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좋습니다.”   1997년 10월 16일,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당시 나이 80세이던 미국 국민화가 앤드루 와이어스(1917~2009)는 그렇게 자신의 작품 238점을 스사키 카쓰시게(須崎勝茂·73) 마루누마 예술의 숲 대표에게 건넸다.   지난 5일 주일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마루누마 예술의 숲 레지던스 5주년 기념 한·일 교류전에서 스사키 카쓰시게 마루누마 예술의 숲 대표가 한국 작가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김현예 특파원 고흐도 모네도 로댕도 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세계적 작가들의 작품 5000여 점을 보유하고 있지만, 미술관은 없다. 대지진 피해지처럼 ‘위로’가 필요한 곳에서 모든 비용을 대고 전시를 하거나, 고향인 아사카(朝霞)시 박물관 등에 무상으로 제공할 뿐이다. 작지만 다부진 체구, 짧은 백발의 그를 지난 5일 도쿄에 있는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마루누마 예술의 숲 한·일 교류전’에서 만났다.   25살 나이, 큰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으면서 뛰어든 창고 임대사업. 회사는 일본의 고도성장기와 함께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일에만 빠져있던 그에게 어느 날 조부가 한 마디 던졌다. “돈이 얼마가 있든 취미가 없는 인생은 쓸쓸하다.” 서른살, 그가 도전한 취미는 도예였다. 동경예술대 학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뜻하지 않게 예술가를  꿈꾸는 학생들의 척박한 환경에 귀 기울이게 됐다. ‘학교를 졸업해도 작업실도, 돈도 없으니 꿈을 이루기 어렵다’는 거였다.   스사키는 그 길로 집 근처 대밭을 갈아엎었다. 그리고 1985년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한 작업실을 세웠다. 마루누마 예술의 숲 레지던스의 시작이었다. 무명의 젊은 작가들을 이곳에 불러와 작업공간 제공은 물론, 재료비 지원, 전시회 지원을 하기를 올해로 40년. ‘아시아의 앤디 워홀’로 불리는 팝아트 작가 무라카미 타카시도 20년간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한 것이 알려지면서 인구 14만여 명의 작은 도시 아사카시의 마루누마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선 꼭 한 번 가고 싶은 곳이 됐다. 8년 전부턴 한해 3명씩 한국 젊은 예술가를 초대하면서 한국 작가들의 발길마저 이어지고 있다. 전시회에서 만난 스사키 대표는 “취미로 인해 세상이 넓어졌고, 이젠 예술가를 키워내는 것이 내 취미가 됐다”며 활짝 웃었다. 평소 유니클로를 입고 다니면서도 반평생 낯선 예술가들을 선뜻 후원해온 아름다운 ‘취미’를 가진 이를, 우리 사회에서도 볼 날이 오길 바라본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2024.04.12 00:18

  • [글로벌 아이] 미국에 홀로 서 있는 ‘원주로’ 표지판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미국 버지니아주 남부 도시 로아노크. 한글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원주로’였다. 1964년 원주와 자매결연을 한 로아노크시가 1982년 220번 도로 500m 구간에 명명한 곳이다. 원주 시청 앞에도 ‘로아노크 사거리’가 있다.   미국은 한국의 유일한 동맹국이다. 한국인들은 71주년을 맞은 한·미 동맹 앞에 자연스럽게 ‘철통같은(iron clad)’이란 말을 붙인다. 그러면서 동맹은 당연하다고 믿는다. 시민들이 매일 지나다니는 로아노크 사거리처럼 말이다.   미국 버지니아주 로아노크시에 있는 ‘원주로’. 1964년 원주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220번 도로를 원주로로 명명했다. 강태화 기자 트럼프 1기 때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던 존 볼턴으로부터 당연한 얘기를 들었다. 그는 본지 인터뷰에서 “한반도 정책의 목표는 한반도 통일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두 개의 정부’가 존재하는 분단 상황에 대해선 “일시적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은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는 헌법 4조에 명시돼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헌법 4조가 당연하지 않게 됐다. 정권에 따라 통일의 대상인 북한에 대한 입장이 달랐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세 차례 김정은을 만났지만 실패했다. 그럼에도 그를 잘 아는 인사들은 트럼프 재집권 시 김정은과의 협상이 재개될 거라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트럼프의 새 설계도에선 ‘운전자’를 자처했던 한국의 역할이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한반도 핵 정책을 총괄했던 리처드 롤리스 전 국방부 아시아·태평양안보담당 부차관은 “한국은 참관자(observer)로 협상장 옆자리(side saddle)에 앉게 될 것”이라며 “한국의 발언권은 있겠지만, 거부권을 행사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북한 주민에게 김정은과 뭘 합의하려는지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북한 주민도 그런 이상주의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과거 대북 선제공격을 주장한 적이 있는 볼턴에게 “그럼 전쟁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즉답을 피했다. 대신 “북한 주민에 적대감을 추구하지 않고 정권을 압박해야 하는데, (한국 정부가) 제재를 위반하는 중국과 러시아를 방치해 왔다”고 답했다.   2012년 원주시는 주민 조사를 통해 자매결연의 상징이던 ‘로아노크 광장’을 폐쇄했다. “자매도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주민 상당수는 광장의 존재 자체도 모른다고 답했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공기처럼 당연해진 결과다. 그러나 외교에서 당연한 것은 없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반도를 둘러싼 공기가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말이다.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2024.04.09 00:38

  • [글로벌 아이] 1분의 망설임도 없었다…대참사 막은 ‘용기’ 배워야

    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한밤중 멀쩡한 다리가 무너져 내리는 일을 다른 곳도 아닌 미국에서 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끊어진 다리 상판, 엿가락처럼 구부러진 철근 구조물, 그 아래 깔린 컨테이너 화물선. 미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프랜시스 스콧 키 브리지’ 붕괴 사고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되겠지만, 그보다 더 또렷하게 기억해야 할 교훈을 남겼다.   지난달 26일 0시39분 볼티모어 선적항을 출발한 화물선 ‘달리’호에서 비상 경보가 울린 것은 오전 1시 24분 59초. 갑자기 동력을 잃고 불빛이 꺼졌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화물선은 교각과 충돌하기 직전 메릴랜드주 교통국에 조난신호 ‘메이데이(Mayday)’를 긴급 타전했다.   지난달 26일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발생한 ‘프랜시스 스콧 키 브리지’ 붕괴 사고. [AP=연합뉴스] 볼티모어 경찰과 소방 당국이 교신을 주고받으며 급히 도로 통제에 나선 시간은 1시25분45초. ‘메이데이’ 전파 후 채 1분이 안 됐을 때다. “한 명은 남쪽에서, 한 명은 북쪽에서 다리 교통을 전면 통제해주세요.”   붕괴 직후만 해도 여러 대의 차량이 다리에서 추락해 실종자가 20명을 넘을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사고 후 공개된 보안 카메라 영상을 보면 1시27분 다리를 통과한 화물차가 마지막이다. 잠시 후 1시28분44초 화물선이 교각과 충돌했고 상판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앉았다.   다리 위에서 작업 중이던 인부 8명이 강물에 빠져 구조된 2명을 뺀 나머지 6명이 실종됐다.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올 수 있었지만 신속한 조난 신호, 그리고 곧바로 다리를 통제하고 차량 진입을 막은 당국자들이 대형 참사를 막았다.   웨스 무어 메릴랜드 주지사가 “수많은 생명을 구한 영웅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했을 때 ‘우리나라였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대형 재난 앞에서 ‘관할 타령’만 하다 골든타임을 놓쳐 무고한 희생자를 낳는 일을 해마다 봐 와서다.   2020년 7월 부산시 동구 초량 제1지하차도 침수 사고에선 시민 3명이 숨지기까지 차량 통제는 없었다. 부산시와 동구청은 지하차도 관리 책임을 서로 미뤘다. 3년 뒤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2023년 7월 집중호우로 불어난 물에 충북 청주시 오송 궁평2지하차도에 갇힌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때도 차량 통제는 제때 이뤄지지 않았다.   위기 신호가 전파되자 1분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행동한 볼티모어 당국자들의 신속한 대처와 용기를 우리 당국자들이 제대로 배워야 한다. 올해도 같은 참사를 겪지 않으려면.     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2024.04.05 00:41

  • [글로벌 아이] 시에스타 논쟁 뜨거운 스페인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식당들이 새벽 1시까지 영업하는 나라는 합리적이지 않다. 영업시간을 계속 늘리는 일은 미친 짓이다.”   최근 스페인을 발칵 뒤집어 놓은 욜란다 디아즈 부총리 겸 노동·사회경제부 장관의 말이다. 밤 10시에도 저녁 식사가 한창인 생활습관을 고수하는 나라에서 좌파 장관이 의회에서 던진 발언은 도발로 받아들여졌다. 우파 정치인들은 즉각 “디아즈 장관은 우리 모두 일찍 집으로 돌아가 등불 아래서 차를 마시며 공산당 선언을 읽기 바라는 것이다”라고 받아쳤다. 업계도 반발했다. 식당 영업시간을 1시간 줄이자는 제안이 엉뚱하게도 이념 논쟁으로 번진 상황이다.   스페인 남부 도시 론다의 식당. 관광객들이 식사를 즐기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스페인은 유럽 국가 중 일과가 가장 늦게까지 이어지는 나라다. 그 이유는 태양이 절정인 오후 2시에서 일을 멈추고 열기가 조금 누그러지는 5시에 재개하는 ‘시에스타(siesta)’ 관습 때문이다. 이 시간, 식당과 상점은 문을 닫고 길거리는 한산해진다. 농경 사회일 때 시에스타는 고단한 일을 잠시 내려놓고 낮잠을 자면서 재충전하는 시간이었다. 2016년 한 조사에 따르면 아직도 이 생활 습관을 그대로 지키는 스페인 사람은 약 18%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낮의 브레이크 타임(break time)은 스페인에서는 관행으로 굳어져 있다.   시에스타 이후 오후 8시까지 이어지는 영업, 이에 따라 늦어지는 저녁 식사, 식사 후 술 한 두 잔 마시며 즐기는 ‘소브레메사’(sobremesa: 식후 식탁에 남아 대화를 즐기는 시간)까지. 식당들이 문을 일찍 닫을 수 없는 조건들이다. 이미 껑충 뛰어버린 종업원 인건비, 이들의 늦은 퇴근 및 귀가로 발생하는 심야 교통비, 그리고 야근으로 생기는 각종 육체적·정신적 건강 문제를 생각한다면 식당 영업시간을 줄이자는 디아즈 장관의 주장은 일리가 없지 않아 보인다.   스페인 노동계는 노동시간을 현행 40시간에서 37.5시간으로 줄여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장시간 일할수록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연구결과를 내세우면서 지난 수년간 스페인만의 특수한 노동 시간에 관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시에스타가 이런 노동시간 축소 논의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모양새다.   인식과 생활습관은 무섭다. 하루아침에 바꾸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종의 문화가 되어버린 생활 관습을 대상으로 하는 논쟁은 예민한 측면이 있다. 스페인의 생산성 제고와 노동시간 단축 과제가 그들의 전통과 맞서며 어떤 변화를 이루어낼지 흥미롭다.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2024.04.02 0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