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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15만에 의사가 내 집 왔다, 그랬더니 '장수현' 된 나가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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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이영희 도쿄 특파원

이영희 도쿄 특파원

일본 도쿄(東京)에서 신칸센으로 1시간 10분 정도 걸려 나가노(長野)현 가루이자와(軽井沢)역에 도착했다. 차로 15분 정도 더 가니 울창한 숲 사이로 목조 건물이 나타났다. 겉모습은 전원주택이나 펜션에 가깝지만, 실은 병원이다. 지난 2020년 창업해 이 지역에 새로운 의료 문화를 만들고 있는 ‘홋지노롯지(ほっちのロッヂ)’ 진료소다.

일본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 있는 '홋지노롯지' 진료소. 이영희 특파원

일본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 있는 '홋지노롯지' 진료소. 이영희 특파원

기자가 진료소를 방문한 지난 25일 아침, 진료 시작 전인데도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병원 내를 오가고 있었다. 내과·소아과 및 통증 완화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의료 시설이지만, 의사·간호사 가운을 입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진료를 받을 때 환자들이 느끼는 부담감을 줄이기 위해 가운을 입지 않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진료소 내부에는 커다란 거실과 부엌, 다양한 책이 꽂힌 도서관, 놀이기구가 쌓인 어린이용 공간이 있었다. 진찰은 2층 다락방에서 한다. 오전 9시가 되자 환자들이 연이어 도착하고 아이들은 놀이방에서, 어른들은 책을 읽으며 진료를 기다렸다.

진료소에는 의사 3명, 간호사가 5명 근무하지만 진료소 내 외래 진료는 월~토요일 오전에만 한다. 나머지 시간은 24시간 체제로 운영되는 방문 진료가 중심이다. 병원 인근 16km 이내에 살고 있는 150여 명의 재택 치료 환자들과 계약을 맺고 한 달에 2~3회 의사나 간호사가 집을 방문해 환자를 돌본다.

비용은 소득에 따라 달라진다. 개호보험이 적용되는 고령자의 경우 월 6700엔(약 5만 8000원)에서 1만8000엔(약 15만 6000원) 수준이다. 후지오카 사토코(藤岡聡子) 공동대표는 “방문 진료 환자는 병원을 왔다 갔다 하기엔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들이 대부분”이라며 “단순히 환자의 증세 뿐 아니라 생활 환경 등을 세심히 살피고 조언할 수 있다는 게 방문 진료의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 있는 '홋지노롯지' 진료소 내부. 거실과 주방, 아이들 놀이방 등을 갖췄다. 이영희 특파원

일본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 있는 '홋지노롯지' 진료소 내부. 거실과 주방, 아이들 놀이방 등을 갖췄다. 이영희 특파원

홋지노롯지는 마을 이름인 ‘홋지’의 ‘롯지(lodge, 산장·오두막)’라는 뜻이다. 병을 치료하는 곳만이 아니라 환자와 보호자, 주민들이 편하게 찾아와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커뮤니티의 역할을 함께 하고 있다. 인근 초등학교와 연계해 학생과 고령자가 교류하는 방과 후 교실을 열거나, 장애 아동들을 위한 데이 케어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후지오카 대표는 “환자라는 존재를 ‘증상’의 관점에서만 접근하지 않고, 다양한 요소를 함께 공유하며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우리의 활동”이라고 말했다.

지난 4년 간 홋지노롯지를 찾은 환자는 4000여명으로, 가루이자와 주민 5명 중 1명이 이용한 셈이다. 이런 진료소의 활동을 인정받아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지역 고령자케어 이노베이션 어워드’에서 일본 병원이나 단체로는 처음으로 사회참여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재택 의료 힘입어 ‘장수현’ 된 나가노

홋지노롯지가 있는 나가노현은 수십 년 전부터 재택 의료의 문화가 자리 잡은 지역이다. 산이 많고 교통이 불편한 여건 때문에 의사나 간호사가 집에 머무는 환자들을 찾아가는 시스템이 일찌감치 정착될 수 있었다. 1945년 사쿠(佐久)시에 있는 사쿠종합병원에 부임한 와카쓰키 도시카즈(若月俊一·1910~2006)가 선구자로 꼽힌다. 그는 ‘예방은 치료를 이긴다’는 신념에 따라 농촌 지역 환자와의 사전 접촉 및 대규모 검진을 통한 예방·치료 통합형 진료를 도입했다.

일본 나가노현 사쿠시에 있는 사쿠종합병원. 나가노현 재택 의료의 전통이 시작된 곳이다. 이영희 특파원

일본 나가노현 사쿠시에 있는 사쿠종합병원. 나가노현 재택 의료의 전통이 시작된 곳이다. 이영희 특파원

이를 계기로 나가노현의 여러 병원들이 왕진과 간병을 포함하는 방문 진료에 나섰다. 후생노동성이 2022년 공표한 2020년 의료시설 실태조사에 따르면 나가노현에서 방문 진료를 하는 의료 기관의 비율은 30%로, 도쿄(13.5%), 오사카(大阪·25%) 등보다 크게 높다. 특히 말기암 환자 등에 대한 재택 완화 치료를 하는 의료기관 비율이 10%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의료 시스템이 나가노현을 ‘장수(長壽)현’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나가노현은 1970년대까지는 일본 내 장수현 순위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90년대부터는 늘 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지난 2020년 기준 일본인의 평균 수명은 남성 81.49세, 여성이 87.60세인데, 나가노현은 각각 82.68세, 88.23세였다. 47개 광역지자체 중 시가(滋賀)현에 이어 두번째 장수 지자체에 선정됐다.

온라인 진료하고 약은 드론으로 

OECD가 집계한 일본의 인구 1000명 당 의사수는 2.6명으로 한국과 거의 같다. 일본도 고령화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2008년부터 2023년도까지 매년 평균 110명씩 의대 정원을 늘렸다. 지방의 의사 부족 문제가 특히 심각해 특정 지역에서 진료할 것을 조건으로 하는 ‘지역 정원제’를 만들어 이 과정으로 뽑힌 학생들에게는 지자체나 대학이 장학금을 지원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후지오카 사토코(藤岡聡子) 홋지노롯지 공동대표. 홋지노롯지를 "환자와 주민들이 소통하고 삶의 질을 함께 높혀 가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영희 특파원

후지오카 사토코(藤岡聡子) 홋지노롯지 공동대표. 홋지노롯지를 "환자와 주민들이 소통하고 삶의 질을 함께 높혀 가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영희 특파원

재택 진료 및 온라인 진료의 도입도 고령화 시대 의사 부족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일본은 코로나19 이후 온라인 진료 조건을 완화하고 진료 보수를 인상하면서 2022년 12월 기준 온라인 진료가 가능한 의료 기관의 비율이 16.1%까지 늘어났다. 의사 부족이 심각한 지방의 경우엔 온라인 진료가 훨씬 빨리 퍼지고 있다. 야마가타(山形)현이 전국 1위로 41.8%, 나가노현이 2위로 38.8%다.

나가노현 중에서도 산악 지역이 많은 이나(伊那)시의 경우, 지난해부터 오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온라인으로 원격 진료를 하고 드론으로 의약품을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일본 고령화 전문가인 김명중 닛세이기초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한국도 지방 의사 부족에 대응하기 일본 의대의 지역 정원 제도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면서 “IT기술을 활용한 온라인 진료를 확대하는 것도 지역 고령화에 따른 의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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