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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하원의장의 ‘굴욕’…한국 국회의장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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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형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미국 하원에서 ‘초유의’란 수식어가 과언이 아닌 일들이 곧잘 벌어지고 있다. 지난 8일도 그랬다.

야당인 공화당 내 극우 강경파 마조리 테일러 그린 의원은 같은 당 소속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의 해임안 표결을 요구했다. 존슨 의장이 여당인 민주당과 손잡고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안과 2024 회계연도 본예산안 처리를 주도한 게 불만을 샀다.

미국 하원의장 해임결의안 관련 본회의 투표를 하루 앞둔 지난 7일 기자회견에 나선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 [AP=연합뉴스]

미국 하원의장 해임결의안 관련 본회의 투표를 하루 앞둔 지난 7일 기자회견에 나선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 [AP=연합뉴스]

벼랑 끝에 몰린 존슨 의장을 구한 건 상대 정당인 민주당이다. 그린 의원이 낸 의장 해임안을 ‘보류(table) 또는 폐기(kill)’하는 안이 스티브 스컬리스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 주도로 상정됐는데 찬성 359표, 반대 43표로 가결됐다. 공화당(총 217석) 내 일부 강경파를 제외한 196명이 찬성하고 민주당(총 213석)에서도 압도적 다수인 163명이 의장 구제안에 찬성표를 던진 결과다. 같은 당 소속 하원의장을 끌어내리려 하고 상대 당이 엄호하는 모습은 피아(彼我)가 뒤바뀐 듯한 초현실적 풍경이다.

이런 ‘내부 반란’이 처음도 아니다. ‘미수’에 그치지 않고 ‘실현’까지 됐었다. 존슨 의장의 전임자인 케빈 매카시(공화당) 전 하원의장은 지난해 10월 공화당 내 또 다른 극우 강경파 맷 게이츠 의원이 임시예산안 처리를 문제삼아 제출한 해임안이 가결되면서 재임 9개월 만에 하차했다. 234년 미 의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 하원의장은 대통령, 부통령에 이어 의전 서열 3위로 미 의회 전체를 사실상 대표한다. 그런 하원의장이 공화당 내 10%에 불과한 강경파에 휘둘리며 굴욕을 겪고 있다.

비슷한 광경이 한국 여의도에서도 벌어지는 듯하다. 더불어민주당 박병석 전 국회의장은 3년 전 언론중재법 처리가 무산되자 같은 당 김승원 의원에게서 ‘GSGG’라는 험한 말을 듣더니 최근 같은 당 출신 김진표 의장은 ‘채 상병 특검법’ 처리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역시 같은 당 중진 박지원 당선자로부터 “진짜 개××”라는 욕설을 들었다.

민주당의 차기 국회의장 후보 경선에서 우원식 의원이 강경 성향의 추미애 당선자를 꺾자 일부 당원들의 탈당 행렬과 문자폭탄이 이어지고 당원 게시판에는 ‘우원식 지지 의원 색출론’이 나왔다고 한다. 당론과 입장이 다르다고 육두문자를 퍼붓고 양심과 소신에 따른 투표 결과를 겁박하듯 대하는 건 민주주의라기보다 전체주의적이다. 다름을 수용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대전제 아닌가. 미 하원의장이 겪은 수모를 한국 국회의장도 경험하게 될 날이 머지않은 듯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