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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대체 누구를 위한 복지공약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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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김영배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한 아이가 가족들의 축복 속에 태어난다. 아이는 부모가 부자이건 가난하건 돈 걱정 없이 무상으로 유치원에 다니고, 무상보육과 함께 12세까지 아동수당도 받을 수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무상급식을 제공받고, 중·고등학교도 무상으로 마칠 수 있다. 대학은 반값으로 다닐 수 있고 졸업하면 고용할당제를 통해 좋은 직장에 쉽게 입사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60세까지 고용이 보장된다. 살아가는 동안 어떤 질병에 걸리더라도 1년에 100만원만 내면 의료비 부담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유럽 복지선진국의 얘기가 아니다. 최근 대선을 앞두고 유력후보들이 쏟아내는 복지공약들이 실현되면 우리나라가 바로 ‘복지천국’이 되는 것이다.

 이 지상낙원은 얼마나 지탱할 수 있을까? 공약들의 실행 여부도 의문이지만 실제 시행된다 해도 1~2년 이내에 재정파탄을 초래해 국가 전체가 위기에 봉착할 것이다. 지난해 도입된 전체 소득계층에 대한 0~2세 무상보육만 해도 시행 1년이 채 안 된 지금 계속 유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서울시 25개 자치구 중 24개 자치구가 재원부족을 이유로 영·유아 보육 관련 추가분담을 하지 않기로 결의했기 때문이다.

 복지는 필연적으로 많은 재정이 소요된다. 무상복지와 보편적 복지가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저해하고 도덕적 해이와 근로유인 약화를 유발시켜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은 논외로 하더라도, 재정이 뒷받침되지 않은 복지공약이 실행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대선 후보들은 집권기간 부자감세 철회나 세출 구조조정 등을 통해 수백조원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확보되는 재원은 기껏 수조원에서 수십조원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재원확보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도 없이 이 많은 복지공약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만약 그렇게 믿고 공약을 발표했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지도자로서 자질을 의심해야 하고,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약을 발표했다면 국민을 기만한 것이다.

 우리나라 복지예산은 빠른 속도로 증가해 왔다. 1990년 3조3000억원이던 것이 2012년 92조원으로 28배 증가하면서 정부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30%에 육박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복지 지출이 10%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에 비해 크게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기존 복지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더라도 저출산·고령화 현상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복지비 비중이 선진국 수준에 근접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복지 선진국인 덴마크(47.1%)나 스웨덴(35.8%)처럼 조세부담률이 높은 나라와 19.7%에 불과한 우리나라를 직접 비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우리 근로소득자 1500만 명 가운데 40%인 600만 명은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는다.

 지금 각 당이 제시하는 복지공약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지난 총선 당시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것처럼 향후 5년간 268조원을 양당의 복지공약 이행을 위해 사용한다면 정부 예산에서 차지하는 복지비 비중이 50%에 근접해 다른 국가사업을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래지향적 비전을 가진 지도자라면 복지확대 경쟁에 몰두하기보다는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공약을 제시해야 한다. 경제환경과 재정여건 등을 감안해 복지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수혜자의 특성을 고려해 선별적으로 지원하거나 근로유인을 제공해 탈(脫)수급을 촉진하는 등의 정책이 필요하다. 재원부담 주체인 사회구성원의 원만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국민을 설득하고 갈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복지가 될 수 있다.

김영배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