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친필 사인한 작전명령 사진은 있는데 진품은 어디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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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사이트의 ‘감결(甘結)’ 사진.

“적의 소식을 듣거든 즉시 비밀리에 보고하되 구두로 전하는 건 허락지 않는다. 일시적 명령이라도 어긴 자는 군법에 부칠 것이다.”

 선조 31년(1598년) 3월 12일 충무공 이순신은 수하 장수들에게 이런 명령을 하달한다. 한 해 전 9월 그는 전선 13척으로 왜군 133척과 싸워 31척을 격파하는 ‘명량대첩’을 치렀다. 하지만 왜군은 여전히 수적으로 우세했다. 충무공으로선 철저한 경계를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명령은 ‘감결(甘結·지시 공문)’로 전해졌다. 윤인수 현충사 학예연구사는 “‘충무공 감결’은 충무공과 그의 부하 장수 안위·이응표 등의 수결(手決·사인)이 있는 유일한 문서”라 고 평가했다.

 그러나 현재 감결은 종적이 묘연하다. 정부나 충무공의 후손인 덕수이씨 종가, 현충사 모두 1945년 광복 이후 행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에 앞장서온 혜문 스님은 지난 15일 문화재청에 감결의 소재를 확인해 달라는 진정을 냈다.

 감결의 존재를 처음 확인한 건 일제다. 1928년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덕수이씨 종손이 보관하던 감결을 사진촬영했다. 흑백사진 원판은 국사편찬위원회가 보관 중이다. 광복 후 문화재 지정이나 목록 작업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감결은 증발됐다. 감결은 92년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의 『충무공이순신유적도감』에서 컬러 사진으로 재등장한다. 출처는 ‘아산 현충사 유물관’이다.

 덕수이씨 문중이 2005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 사이트에도 또 다른 감결 컬러 사진이 올라와 있다. 그러나 덕수이씨 종가와 현충사 모두 “현재 감결을 소장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감결이 사라진 것은 정부가 충무공 유물 관리에 허술했던 탓이다. 혜문 스님은 “69년 당시 정부는 현충사 성역화 작업을 하면서 충무공 유물을 대거 수집했지만 정작 감결의 존재는 몰랐다”고 말했다. 2009년 덕수이씨 종가와 종부(宗婦) 최모(56)씨가 충무공 고택과 유물을 놓고 소송을 벌이는 중 유출됐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혜문 스님은 “보물로 지정된 ‘충무공 선무공신교서’도 언론 보도(본지 2007년 4월 28일자 8면)가 나간 뒤 덕수이씨 문중 관계자가 문화재청에 기증했다”고 지적한다. 문화재청은 의심이 든다고 해서 함부로 조사하긴 힘들다는 입장이다. 성균관대 신승운 교수 는 “충무공 감결에 대해 정부 차원의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감결(甘結)=조선시대 상급기관이 하급부서에 보내는 지시 공문. 행정명령 체계 및 당시 정치·사회상을 알 수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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