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 음식잡설] 피맛골에 걸려있던 설렁탕 솥, 다 어디로 갔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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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 나고 자랐으니 나는 서울내기이다. 어려서 아버지 고향인 경북 영주에 가면 아이들이 놀렸다. “서울내기 다마네기.” 단순한 조롱은 아니었고, 은근한 부러움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1970년대 초, 농촌이 점차 붕괴되면서 많은 이가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은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 영어로 메트로폴리스(Metropolis)가 되었다.

 당시 초등학교는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많아 3부제 수업을 하던 시기였다. 서울 전통 토박이가 사는 종로 일대에는 학교가 많았고, 강남 시대는 아직 본격적인 개막을 알리기 전이었다. 나는 도심에 있는 중앙중학교에 가면서 진짜 서울내기들을 친구로 두게 됐다. 북촌 일대에 살던 녀석들의 집에 가면 독특한 억양의 사투리가 들렸다. 표준말을 쓸 법한 동네에서 사투리가 특이하다고 했는데, 나중에 소설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 등장인물들이 바로 그런 어투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 사투리’였다.

 친구 집에 가면 맛있는 음식도 있었다. 유달리 빈대떡을 자주 얻어먹었던 것 같다. 마당에 연탄 화로를 놓고 어머니들은 빈대떡을 부쳤다. 밥상을 받아 들면 시원하고 물 많은 김치가 올랐다. 심심하게 간을 해서 아삭한 맛을 살린 김치였다. 집집마다 내력은 달랐겠지만, 김치의 전형은 같았다. 나중에 공부를 해서야 그것이 ‘서울 북촌식 김치’라는 걸 알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가을이면 코맹맹이 소리의 마포 새우젓 장수가 동네를 돌아다녔다. “마포 새우젓이요, 새우젓.” 한데 그 특유의 비음 타령이 없어진 게 언제였던가. 두부장수의 요령소리도 함께 사라지고. 아마도 그들이 사라진 것과 서울의 토박이다운 본색이 흐려진 건 같은 시기였을 것이다. 동네마다 중국식 호떡집도 있던 때였다. 일제 강점기 때 들어온 호떡집은 한때 청요릿집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나는 그 호떡집을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일 것이다. 주물로 된 거대한 화덕 안에 일일이 반죽을 넣어 기름 없이 호떡을 구웠다. ‘호떡집에 불 나던 시절’이 저물고, 기름에 지진 호떡이 득세했다.

 친구 아버지를 따라 장안의 이름난 음식점을 찾아다니던 것도 그때였다. 그때는 설렁탕집도 참 많았다. 우미관에서 피맛골로 이어지던 길 구석구석에는 설렁탕 솥을 건 집들이 있었다. 설렁탕이 서울 음식이라는 건 물론 요즘 안 일이다. 희미하게 한두 집이 유산처럼 남아 있는 지금, 펄펄 끓던 탕에 데인 혀의 느낌이 왜 그리 생생하게 도드라지는지. 상고머리에 칼라 있는 짧은 위생복을 입고, 깍두기 국물이 든 노란 양은주전자를 들고 홀을 돌던 ‘뽀이’들은 다 어디 갔을까. 서울은 제 맛을 다 어디 주고, 혼자가 되었나 모르겠다.

 학교 앞에는 오래된 분식집 거리가 있었다. 최근 모교를 방문했더니 몇몇 집이 이름을 바꾼 채 성업하고 있었다. 버스 회수권과 토큰도 받던, 배고프던 청소년기의 기억이 깃든 집들이 아직도 있다니…. 전설이 되살아난다고나 할까. 그때 떡볶이는 접시에 받아먹기는커녕 그대로 길에 서서 집어먹었다. 계산도 알아서 하는 식이어서 뱃구레가 큰 녀석들은 언제나 개수를 속이곤 했었다. 뻔히 알았을 주인네들은 결코 추궁하는 법 없이 그저 동전 몇 푼이나 회수권을 받았다. 그 인정이 삼삼하게 되살아나서 2012년 겨울 초입 서울의 오래된 골목이 결코 쓸쓸하지만은 않았다.

박찬일 음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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