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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에게 드리는 말씀 전문]

중앙일보

입력

<광복의 날에 즈음하여 오늘의 난국을 생각한다. >

우리는 오늘 쉰 여섯 번째 광복의 날을 맞이하면서 헝크러저 가는 조국의 현실을 아픈 마음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한국 근대사의 최대 비극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였습니다. 그 비극의 뒤안길에는 우리들 사이에 벌어진 극심한 분열과 대결의 각축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여 일본이 어부지리 (漁父之利) 를 획책한 것이 한일합방이라는 비극적 사건이었습니다.

그 비극은 광복으로 종말을 고하는 듯 했으나, 우리는 그 뒤에 좌우의 극심한 대결로 말미암아 조국의 분단이라는 불행한 역사를 초래하고, 6.25 라는 민족상잔의 전쟁까지 치루어야 했습니다. 그 후 우리는 4.19 민주화혁명, 5.16 군사쿠데타, 80년대 민주화운동 등을 거치면서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엄청난 역사적 전개를 향한 고통스러운 삶을 체험해 왔습니다.

오늘 쉰 여섯 번째 광복의 날을 맞이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한마디로 우리는 불신과 반목 속에서 '흔들리는 나라'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을 '문명의 대전환기'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산업화 문명과는 다른 새로운 문명이 동트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예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판에서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옛것에 그냥 매달리지 않고 새로운 처방을 찾아 나서야 한다고들 합니다. 사실, 앞서가는 나라들은 새것을 찾아 치열한 경쟁의 길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 변화를 '개혁'이라 하든 '혁명'이라 하든,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 남기 위한 불가피한 몸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고 방식에서부터 제도, 법, 관행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맞지 않은 것은 과감히 바꾸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안이한 태도를 취한다면 우리는 다시 역사의 낙오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새로운 변화의 그림을 그리면서, 역사 창조의 대열에 나서고 있습니까?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옛 역사의 '낡은 장부'를 뒤적이면서 적과 동지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가르는 데 온 힘을 쏟아붓고 있는 살벌한 풍경입니다.

오늘은 새 역사의 그림을 그리고 새로운 희망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야 할 때입니다. 험한 풍랑을 만난 선원이 먼저 할 일은 배를 안전하게 지키는 작업입니다. 일의 우선 순위와 완급을 무시하면 배가 난파의 위기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지나간 어지러운 반칙사회의 깊은 수렁 속에 살면서 더럽혀진 우리 모두의 몸을 깨끗이 씻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홍제천 (弘濟川) '을 만들어 모두가 그 곳에 뛰어들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새로운 시작을 해야합니다. 이러한 '대탕평의 거사'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오늘의 역사적 도전에 대한 응전의 묘책을 짜내는 일입니다. 물론 그 묘책의 방향과 내용 그리고 방법은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묘책을 선도하는 사람들은 우선 자신부터 깨끗해야됩니다. 그리고 자신부터 변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떤 변화와 개혁의 목소리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것은 진정한 '민주적 공론의 광장'입니다. 그토대가 되는 것은 화이부동 (和而不同) 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불완전함을 전제하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내세우면서도 남의 생각과 주장이 들어설 자리를 비워두는 그런 마음가짐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성숙한 세상은 진보와 보수 그리고 중도가 모두 제 색깔을 당당히 드러내는 한편, 공론의 광장에서 합리적 토론을 통하여 공동선을 추구하는 세상입니다. 열린 사회, 성숙한 사회는 단색의 사회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최근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 부추기는 극단적 양극화 현상은 사회통합을 해치는 분열주의로 규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성숙한 열린 사회를 만들기 위한 최우선의 과제는 신뢰의 구축입니다. 왜냐하면 신뢰는 모든 공론과 법과 제도의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곳에서는 어떠한 참된 공론과 대화도 불가능합니다. 신뢰가 무너진 곳에서는 어떠한 제도나 법도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에 신뢰의 구축을 위하여 우리는 모두 지금까지의 실패와 잘못을 인정하고 새롭게 정직한 출발을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역사적 대 전환기의 문턱에 서서 실패의 역사를 반성하면서, 21세기를 우리가 어떻게 헤치고 살아 갈 것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역사의 도전 앞에서 우리의 생존을 어떻게 지키며, 우리의 후세들이 살아 갈 삶의 토대를 어떻게 마련해 줄 것인가를 놓고 매우 긴 호흡으로 숙고해야 할 때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매우 단호한 결단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에 종사하며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남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권력으로부터 모두에게 봉사하는 권력으로, 혼자 독점하는 권력으로부터 함께 잘살게 하는 나누는 권력으로의 일대 전환이 요구됩니다.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도 큰 결단이 요청됩니다. 일반 사람들이 침묵할 때 말해야하며,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를 넘어서서 공동체 전체가 나갈 방향과 방책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책무를 다하고자 하는 결단이 요청됩니다.

많은 돈을 버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결단이 요청됩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그 모든 것을 남겨놓고 갈 수밖에 없다는 엄숙한 현실 앞에서, 어떻게 하면 이웃과 더불어 보람있는 삶, 존경받고 사랑받는 삶을 살수 있는가를 깊이 숙고하고, 올바른 돈의 철학을 실천하고자하는 결단이 요청됩니다.

우리들 보통 사람에게도 큰마음의 결단이 요청됩니다. 내 이웃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만 먼저', '내것만 제일'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허둥대는 소아 (小我) 의 세계로부터 벗어나서, 이웃과 더불어 숨쉬는 공동체의 한 식구로 살아가고자 하는 큰 결단이 요청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각종의 집단이기주의를 내세우는 거센 목소리들로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이것은 결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존중되거나 정당화 될 수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숙한 시민의 모습이 아닙니다.

광복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는 '동방의 빛'으로 거듭나서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공동체를 가꾸어 나가려는 우리의 생각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를 희망합니다.

2001년 8월 14일
성숙한사회가꾸기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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