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수면 버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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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호 30면

버스는 아주 큰 수면제다. 회사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를 때마다 남편은 다짐한다. 이번에는 졸지 말아야지. 새마을연수원 앞 정류소에서 꼭 내려야지.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결심하지만 어느새 잠들고 만다. 자다가 아차 눈을 뜨면 내려야 할 정류소를 이미 서너 곳은 지나친 후다.
피곤하면 버스에서 졸 수도 있지. 깜빡 졸다가 정류소를 지나쳤다면 다시 돌아오는 차를 타면 될 것 아닌가. 만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이다. 남편의 아내를.

상냥한 아내는 아홉 시쯤 늦은 저녁 식탁을 차려놓고 남편을 기다린다. 아마 일곱 시부터 아내는 시장기를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아내는 참는다. 안 그래도 늦은 저녁을 남편 혼자 들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남편이 집에 도착할 아홉 시가 되어도 남편은 오지 않는다. 다른 저녁 약속도 없었다. 게다가 남편은 여덟 시쯤 사무실을 나서면서 “지금 출발해”라는 문자까지 보내오지 않았던가.

강남에서 1005-1번 버스를 탄 남편은 자리에 앉아 이런 생각을 한다. 차를 타면 왜 이렇게 졸리는 것일까? 버스 안이 그렇게 안락하거나 안전한 곳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진동 때문이 아닐까. 아직 어머니 뱃속에 들어 있을 때, 그 가장 안전하고 안락한 곳에 있을 때 온몸으로 느꼈던 어머니 심장의 고동을, 양수의 출렁임을 버스 흔들림에서 다시 느끼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무턱대고 졸린 것은 아닐까. 마치 태아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버스가 양재를 지나 고속도로에 들어설 때쯤 남편은 잠의 자궁 속으로 빠져든다.

남편이 도착할 시간인 아홉 시에서 오 분이 지난다. 밤 아홉 시에서 아홉 시 오 분 사이에는 그래도 너그러운 아내가 산다. 그러나 그 오 분이 십 분이 되고 이십 분이 되는 동안 상냥한 아내는 참을성 있는 아내가 되었다가, 걱정하는 아내가 되었다가, 화난 아내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우울한 아내가 된다.

남편은 또 졸고 말았다. 눈을 뜬 남편이 부랴부랴 내린 곳은 내려야 할 정류소를 한참 지난 정자2동 주민센터 정류소였다. 남편은 길을 건너 다시 버스를 타고 되돌아가야 한다. 이렇게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할 때면 남편은 오래 전 본 영화 ‘아타나주아’의 팸플릿 글이 떠오른다. 에스키모인은 화가 나면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아무 말 없이 화가 풀릴 때까지 그 얼음 평원을 걷고 또 걷는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또 걸어서 화가 다 풀리면 그때 비로소 멈춰 서서 온 길을 되돌아 다시 걷는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은 뉘우침과 이해와 용서의 길이라는 것이다. 에스키모인이 처음에 가는 길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가는 것이니 얼마나 힘들고 먼 길인지 알 수 없었을 테지만, 화가 풀리고 난 후 다시 돌아오는 길은 얼마나 멀고 춥고 하염없었을까. 그 먼 길을 돌아오면서 그 거리만큼 화냈던 바보 같은 자신을 얼마나 꾸짖고 또 꾸짖었을까?

정자2동 주민센터 정류소에서 좀처럼 오지 않는 1005-1번 버스를 기다리며 남편은 에스키모인처럼 자신을 꾸짖고 또 꾸짖는다. 참다 못한 아내가 남편에게 휴대전화를 걸 때쯤 남편은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허둥지둥 집으로 막 들어선다. 아내처럼 싸늘하게 식은 저녁 식탁이 있는 집으로.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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