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진보가 아닌 파괴의 상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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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만에 지각 번역된 『위기의 현대과학』에 담긴 정보는 시차와 상관없이 의연히 중요하다. 현대과학의 담론 변화에 둔감한 데다 특히 시야 자체가 제1세계에 갇혀있는 우리네 외눈박이식 지식구조에 자극을 주기 위한 도구로 가치는 여전히 높다.

이 책은 과학기술은 진보의 상징라는 통념에 대한 문제제기로 시작한다.

과학기술이 개발과 경쟁력의 필수조건이라는 한국인의 평균적 신조도 간단하게 뒤집는다. 이런 식이다.

"서구의 현대 과학기술은 애초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유해하고 위험한 어떤 것이었다" . 즉 여전한 빈곤, 환경재앙 등 사회.환경적 부작용은 현대과학의 약속 실현을 방해한 사회제도의 탓이 아니고, 과학기술 그 자체의 한계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결론은 단일 저자의 목소리가 아니다. 1986년 제3세계 네트워크와 페낭소비자연맹의 세미나에 참가한 지구촌 과학자.교수들 1백40명이 얻어낸 판단이다. 제3세계 네트워크는 유엔 등에도 자문하는 국제규모 포럼.

이 책은 17세기 계몽주의 이래 서구의 지적유산부터 메스를 들이댄다.

가치.윤리로부터 분리된 도구적 이성을 금과옥조로 삼았고, 그 결과 '순수한 객관성' 이라는 허울 뒤에 제국주의적 지배와 통제라는 의도를 숨겨버렸다. "이런 현대과학의 형이상학이 우리를 파괴로 이끌고 있다" 고 이 책은 비명을 지른다.

게다가 제3세계의 다양한 지적유산에 비(非) 과학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바람에 7~14세기 융성했던 이슬람의 수학과 자연과학, 고대 이래 중국의 과학은 물론 전통문화까지 일거에 싹쓸이됐다고 지적한다.

함축적이면서도 선언적 서술로 일관하고 있는 이 책은 시집 판형보다도 작고 가볍지만, 위력있는 문제제기를 담고 있어 전공과 상관없이 지식사회 필독서로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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