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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과 나누면 창의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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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신동희
성균관대 교수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2009년 시작된 WCU(World Class University·세계 수준의 연구중심 대학)는 융합학문 활성화를 통해 국내 학문 수준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차세대 신성장동력을 발굴해 내는 연구중심 사업이다. 이제 종료 10개월을 남겨놓은 이 사업은 국내에 새로운 융합의 방향을 제시하고 국내 연구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럼에도 그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한 것은 여러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가장 큰 장애는 국내의 뿌리 깊은 학제 간 장벽이다. WCU는 융합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인데 이미 구분된 학제(공학·자연과학·인문·사회과학 등)에 따라 지원해야 했다. 융합을 고취하자는 WCU가 기존 학제 간 구분을 그대로 차용해 진정한 융합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뿌리 깊은 문과·이과 구분의 틀이 WCU에서도 적용됐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출발이었다. 새로운 학문 분야와 신성장동력을 창출하고자 했던 WCU 사업도 결국 구태의 이분법적 틀 안에서 전략을 추구하는 결정적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스마트 시대에 기술발전을 둘러싼 세상은 복잡다기해지는데 그런 복잡계(Complex System)를 문과와 이과라는 극도로 단순화된 이분법으로 어떻게 담아낼 수 있는가?

 대학입시에서 인문계와 자연계로 나누는 것은 일제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융합과 통섭의 시대인 스마트 시대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고등교육을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 교육하고 있는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인 일본과 한국뿐이다. 고교생들은 문과와 이과로 구분된 다른 커리큘럼 하에서 교육을 받게 되고, 대학에 지원할 때도 두 가지의 이분법 중 선택을 해야 한다.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을 두 개로 나누어 하나의 편협한 세계관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문·이과로 정확히 나눌 수 없는 경계에 수많은 학문이 있고, 이러한 새로운 학문은 통섭의 시대에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문·이과의 구분은 학문적 편식을 고착화시키고 다양한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한다. 미국 대학은 학생들에게 전공에 관계없이 인문학·자연과학 등 학문의 기초를 가르치는 데 큰 비중을 두고 있어 다른 학문 분야에도 금방 적응할 수 있는 수학 능력을 갖추도록 하고 있다.

 기술과 인간의 이분법적 구분이 아닌 융합과 통섭을 통한 창의로운 생각이 세계적인 애플 제품을 만들어 냈다. 기존에 세분화됐던 학문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각 분야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떼어내 새로운 창조물을 만드는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 새롭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지식의 통섭과 학문의 융합이 빨라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주어진 하나의 학문 분야 안에 안주하기보다 타 분야나 타 학문에 대해 좀 더 개방적인 자세를 가지고 다양한 분야를 창의적으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

 융합은 서로 다른 두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남들이 보지 못하는 연결고리를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작업이다. 아이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제는 세분화된 지식이나 기술보다는 창의성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제품이 세계를 이끌어간다. 창의성이나 새로움 같은 개념은 기존의 한 분야에서 나오기는 매우 어렵다. 최근 우리가 부닥치는 대부분의 문제는 과학기술 지식뿐 아니라 인문·사회적 지식까지 융합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융합과 통섭에 대한 체계가 올바르게 잡히지 않았다. WCU사업이 종료되고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는 시점에서 융합학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공감대가 확산하길 바란다.

신동희 성균관대 교수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