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루기] 존칭, 완전히 망가지셨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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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얼마 전 냉장고 소음이 심해져 서비스센터에 연락했더니 약속시간에 맞춰 직원이 집으로 왔다. 냉장고를 살펴보더니 그 직원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모터가 망가지셨습니다.” 아니 모터가 무슨 사람인가. 모터한테 그렇게 존댓말을 쓰게-. 마치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에게 “콩팥이 망가지셨습니다”고 얘기하듯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요즘 이처럼 물건에 대고 존댓말을 쓰는 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셨습니다’는 ‘시었습니다’의 준말이다. 여기에서 ‘시’는 존경을 나타내는 어미다. 상위자와 관련된 동작이나 상태와 결합해 그를 높이는 말로 쓰인다. 주어는 상위자 또는 상위자의 신체 일부 등이 된다. “아버님께서 오시었다(오셨다)” “선생님은 키가 크시다” “충무공은 훌륭한 장군이셨다”처럼 사용된다. 따라서 물건인 모터를 주어로 해서 높임말인 ‘~셨습니다(시었습니다)’를 쓸 수는 없다.

 이런 말은 우리말 존칭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에게서나 듣던 표현이다. 간혹 코미디 프로에서 우리말이 어눌한 서양인이나 동남아인을 우스꽝스럽게 흉내 낼 때 이런 식의 존칭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제는 한국 사람들이 이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고객에게 예의를 갖춘다는 것이 지나쳐 엉뚱한 표현이 유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터처럼 사람과 관련된 것이 아닌 경우에는 ‘~셨습니다’가 아닌 ‘~습니다’를 활용해야 한다. 즉 “모터가 망가졌습니다”고 해야 한다. 이런 식이라면 TV가 고장 난 집에서는 “회로가 망가지셨습니다”고 할 게 틀림없다. 요즘 “신상품 나오셨어요”나 “5만원이세요” 등과 같은 엉뚱한 존칭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각각 “신상품 나왔어요” “5만원입니다” 등이 바른말이다.

 이런 이상한 높임말을 자주 듣다 보니 나도 헷갈린다. 고친 냉장고가 다시 고장 나면 나도 이번엔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해 “냉장고가 또 고장 나셨습니다”고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거야 정말 “우리말 존칭, 완전히 망가지셨습니다-”(“~망가졌습니다”가 바른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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