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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가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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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당당하게 치켜든 얼굴, 우뚝한 콧날, 중생을 향해 펼친 손, 이런 그를 든든히 받쳐 올린 연화대좌(蓮花臺座)…. 자주색 천 위에 놓인 금동불, 작지만 존재감은 충분했다.

 손에 든 약병이 그의 이름을 알려준다. 약사여래(藥師如來),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없애주는 부처다. 약사여래는 신라의 구세주였다. 삼국 간의 전쟁으로 희생자가 많았던 터다. 군데군데 슨 녹이 그가 견딘 세월을 말해준다. 7년간 이 불상을 애장해 온 A씨는 “개성 영통사 복원 중 나왔다더라”라고 했다. 고려 현종 18년(1027) 창건된 영통사는 왕실과 밀접한 사찰이었다. 2002∼2005년 남북이 공동으로 복원했다. 담뱃갑보다 조금 큰 정도로 손에 쥐기 딱 좋았을 이 불상, 고려 왕가의 불심 깊은 여인이 지녔던 걸까.

 19일 감정을 의뢰받은 ‘이 사장’이 손전등 달린 돋보기로 꼼꼼히 살폈다. 그러나 첫마디가 이랬다. “남한에서 만든 겁니다. 그것도 30여 년 전. 염산으로 부식시켜 녹슬게 했네요.” 겹겹이 섬세한 손도금, 신라 약사여래상의 양식을 집대성한 자신만만한 솜씨는 영락없는 ‘김천 손 도사’ 것이라 했다. 손 도사는 섬유산업이 활황이던 1970년대 후반, 대구 일대의 불심 깊은 섬유 사업가들에게 인기 있었던 불상 장인.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부분).

 -북에서 온 거라는데요.

 “아침에 배에 실어보내 북한 땅에 묻어 ‘세탁’한 뒤 저녁에 서해바다 위에서 팝니다.”

 여래께서 일찌감치 남북을 오가며 통일 역군으로 뛰셨던 셈인가. 그러고 보면 “북한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으로 중국에서 입수했다”는 것은 기본, 심지어 “동북공정을 막을 결정적 증거인 금니(金泥)사경을 찾았다. 중국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널리 알려야 한다”는 제보도 받아봤다. 사기꾼들의 전형적 언론 플레이다.

 -진짜였다면 어느 정도일까요.

 “1억5000만원에서 2억원 정도. 보물이나 지방 문화재 지정도 받을 수 있었을 테고요.”

 -잘생긴 불상인데 아깝네요.

 “그러니까 손 도사 거라는 겁니다. 안성 장씨도 잘했다지만 손 도사를 따를 자가 없었어요. 둘 다 이제 세상에 없습니다. 요즘은 다들 전기도금으로 하는데 이건 손도금이에요. 이렇게 제대로 빼려면 1000만원 이상 들죠. 이젠 돈 주고도 못 만들어요.”

 장인이 어쩌다 범죄의 길에 들어선 걸까. 이러니 고미술 시장이 빙하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이다. 고미술협회(회장 김종춘)는 2006년 이후 3년간 감정한 1885점 가운데 47.3%를 가짜로 판정했다. 협회장부터 가짜 및 도굴품 거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판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