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가을무에 단맛을 들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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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김서령
오래된 이야기 연구소 대표

가을무에 맛이 들 철이다. 알다시피 제철 채소는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하다. 철마다 다른 채소를 길러내는 땅에 발을 딛고 산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황홀하다. 이승에 생명을 얻어 사는 보람은 그걸로 충분한 건지도 모른다. 그 외의 것은 모조리 덤이다. 영화를 보는 것도, 새 옷을 입는 것도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마주 앉은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도, 아이를 낳는 것도, 그 아이의 입안에 밥을 넣어주는 것도, 내 몸이 이 땅에 발을 디디는 기쁨 이후에 감각하는 덤에 속한다. 누구의 삶이든 이 덤이 크니 생명을 얻어 지상에 둥지를 튼다는 것은 꽤나 남는 장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우린 덤에 취해 정작 본질을 잊고 산다.

 생의 본질! 그건 가을무의 푸른 어깨에 있다. 땅속에 백일 정도 뿌리를 박고 자라면 무는 지기(地氣)를 받아 지면 위로 불쑥 솟아오른다. 거기 맑은 바람과 햇볕이 쏟아지고 간간이 젖줄처럼 빗물이 퍼부어진다. 무를 키운 지수화풍(地水火風)은 바로 내 생명의 핵심이기도 하다. 나 역시 무처럼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존재, 땅과 바람과 햇볕과 물 없인 단 사흘도 버틸 수 없다. 땅 위로 솟아 햇볕을 받은 무는 점차 제 머리 위로 드리운 무청의 싱그러운 빛깔을 닮아간다. 가을이 돼 햇살과 바람 속에 서서 그 푸른 무를 한 입 와사삭 깨물어 먹는 일, 그건 순도 100%의 기쁨이다. 사람은 그런 순수하고 완벽한 순간에 영원에 닿는다. 그런 순간을 만끽하는 이들만이 우주와 생명의 비밀스러운 뜻을 포착할 수 있다.

 무는 채소지만 우리 집에선 과일 버금가는 대접을 받았다. 가을무는 달고 물이 많아 웬만한 배는 얼씬도 못 했다. 겨우내 우리 집 부엌에서 채 썰어지고 깍둑 썰어지고 어슷 썰어진 무가 네댓 접은 족히 됐을 것이다. 무 요리 중 내가 특히 좋아한 건 ‘난젓’이었다.

 난젓! 그건 ‘난타’의 ‘난’과 같은 항렬로 마구 두드린다는 의미였다. 가을이 깊어지면 엄마는 난타 공연하듯 도마를 리드미컬하게 두들겼다. 도마 위에 올려진 건 ‘물명태’였는데 안 말린 명태를 우리 집에선 생태라고 하지 않고 물명태라고 불렀다. 그 물명태를 난도질한 후 무의 머리 쪽 푸른 부분을 듬뿍 채 썰어 넣고 멸치젓갈과 고춧가루와 마늘에 버무려 담는 요리가 난젓이었다.

 난젓은 일단 입에 들어가면 침이 확 돌고 시원하고 달았다. 요리에 설탕을 쓰기 시작한 건 대중식당이 늘어난 시점과 비슷한 것 같다. 식당 요리란 게 원재료에서 우러나오는 단맛을 충분히 내기 어렵기에 대신 양념에다 설탕을 푹푹 퍼 넣었다는 혐의가 짙다. 집에서 만든 음식에 설탕이란 어림없었다. 설탕의 해악을 파악해서라기보다 설탕이 내는 경박한 단맛을 모두들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설탕이 전혀 없어도 다들 걸핏하면 달다고 말했다. 무가 달고 명태가 달고 간장이 달고 마늘이 달고 멸치젓갈이 모조리 달았다. 그건 단맛 하나만이 도드라지는 사탕수수의 단맛에 비해 얼마나 은근, 심오한 단맛이던가.

 대통령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는다. 마음 편하게 가을무의 단맛을 느끼게 해달라! 등 따습고 배부른 것이 정치의 왕도라지만 아무리 방바닥이 절절 끓고 밥을 두세 공기 비워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온기와 포만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세상에 만연한 박탈감, 소외, 분노, 우울의 총량을 줄여놔야만 가을무가 제대로 단맛을 낼 수 있다. 어두운 기운이 성한 지수화풍을 받고 자라난 무는 제철에 한 입 콱 베어 물어도 왠지 지리고 맵기만 하다. 그래서인지 주변 사람들이 다들 아프다. 겉은 멀쩡해도 들여다보면 눈동자 안에 스산하고 불안한 표정이 감춰져 있다. 고단해서, 억울해서, 돈이 안 벌려서, 외로워서, 자식이 맘대로 안 돼서 다들 속이 상하고 그 상한 속이 주인의 몸을 아프게 만든다. 아픈 사람에게 음식의 단맛이 제대로 느껴질 리 없다. 음식의 단맛 없이 감사와 충만이 어디 있을까. 가을 무 한 입으로도 삶의 도약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 인간이련만!

 이젠 천상 정치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정직하고 진지한 리더는 우리 땅 지수화풍의 기운을 온화하게 바꿔놓을 수가 있다. 대통령 후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말이 아니라 눈을 보면 누가 가을무에 제대로 된 단맛을 들일 인물인지 짚어낼 수 있다. 우린 천부적으로 그 정도의 감각과 지혜쯤은 타고난 사람들 아니냐!

김서령 오래된 이야기 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