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주리 기자의 ‘캐릭터 속으로’] ‘착한 남자’ 이광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이광수

‘막돼먹은 영애씨’의 영애, 김현숙을 만난 적이 있다. 내내 유쾌했던 그가 갑자기 심각해졌다. 오랜 시간 변방에 머물렀던 그에게, 정말 해보고픈 배역을 물었을 때다.

 “어떤 역할이든 상관없어요. 다만, 존재의 이유가 있어야 하죠. 보통 주인공 친구 역은 가치관도, 꿈도 없죠. 그냥 주인공의 얘기를 들어주기 위해 등장하는 역, 그건 싫어요.”

 그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드라마를 볼 때면 조연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오랜만에, 존재의 이유가 있는 조연을 발견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KBS)의 재길이, 이광수(27)다.

 훌쩍 키만 큰 재길은, ‘도련님’ 정체를 숨기고 마루(송중기)와 함께 사는 남자다. 마루·재희(박시연)·은기(문채원)의 삼각관계는 극으로 치닫고, 착하디 착했던 마루는 재희에게 받은 상처로 점점 나쁜 남자로 변해간다. 여자들을 꼬여내고, 사기를 치면서….

 재길은 그런 마루가 안타깝기만 하다. 그리고 어느 날, 마루에게 사기를 당해 자살시도까지 한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재길, 마루를 붙잡고 펑펑 운다.

 “마루 너 요즘, 사막 같어. 돌아와. 제발.”

 재희에게 버림받은 마루가 세상을 다 버린 표정을 짓고 있을 때도, 덩치가 산만한 이 남자가 우는 장면보단 슬프지 않았다.

 드라마는 자꾸만 묻는다. 인간은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 거냐고. 믿음이나 사랑 따위가 존재하기는 하는 거냐고. 희망이 점차 지워져 갈 때, 휘청대는 우리를 잡아주는 건 오직 재길뿐이다. 그는 외국인 노동자를 괴롭히는 아버지를 버렸고, 아버지보다 더 악한 형을 배신했다. 배신자 재길은, 여자에게 사기를 당하고 가진 돈을 모두 털려도 선이 이긴다는 믿음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는다.

 ‘도망친 부잣집 도련님’이란 전형적 캐릭터 재길은, 이광수 덕에 신선해졌다. 험상궂은 것 같으면서도, 정작 한 대 맞으면 울기만 할 것 같은 순한 면이 있어서다. 그러고 보니 ‘지붕 뚫고 하이킥’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하숙집 주인인 김자옥이 냄새 나고 지저분한 것만 보이면 광수 탓을 한다. 사실 광수는 엄청 깔끔한데도 말이다. 이야기는 광수가 내내 억울함만 호소하다 끝난다. 그때도 이 남자는, 구시렁대기만 할 뿐 해코지를 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껑충한 키, 어쩐지 억울해 보이는 인상, 덩치만 크지 순하디 순한 기린 같은 남자. 마루는 아마도 그가 있어 여태껏 버티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 이건, 재길을 위한 타이틀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