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해외칼럼

EU는 위기를 통해 단련됐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7면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BC 540 무렵~BC 480 무렵)는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위기는 만물의 어머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강대국 간에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은 현재로는 거의 없다. 핵무기에 의한 상호 확증파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진행 중인 글로벌 재정위기 같은 주요 국제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은 상존한다.

 그런데 이런 위기는 인류에게 결코 좋은 일은 아니지만 완전히 나쁜 것만도 아니다. 전쟁과 마찬가지로 위기는 기본적으로 현재의 상태를 뒤흔들어 놓는다. 이는 위기가 다양한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일상 상황에서는 결코 발생하기 힘든 과감한 변화를 몰고 오며, 사람들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평상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을 과감하게 벌이기 때문이다.

 지난 3년간 유럽연합(EU)에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글로벌 재정위기는 유럽을 근본부터 뒤흔들었으며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2009년 재정위기가 시작됐을 당시와 비교하면 지금의 EU는 완전히 달라졌다. 사실 위기가 발생한 직후에는 재정적자 수준 유지 의무 등 다양한 재정적 터부가 있었지만 그동안 위기 대응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졌다. 원래 유럽 최대 경제국가인 독일이 제안했던 이들 터부는 위기 탈출에 꼭 필요하다는 다른 회원국들의 요구에 따라 대부분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유럽 최대의 경제국인 독일은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 탄생 이후 유럽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해졌다. 독일은 이제 EU의 지도국가가 됐다. 이 과정에서 독일은 EU 회원국들의 다양한 요구를 들어주고 자국의 뜻을 오히려 굽혔다. 위기니까 가능한 일이다.

 최근 들어선 재정위기를 극복하려면 EU를 정치·경제적으로 더욱 강력하게 통합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지고 있다. 문제는 이를 위해선 EU 협정을 개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27개 회원국(가입 조건 충족에 거의 접근하고 있는 크로아티아가 조만간 가입하면 28개국이 된다)을 가진 EU의 협정 개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영국이 유럽의 추가 통합에 반대 입장을 보이는 것도 한 이유지만 실제로는 회원국이 국민투표로 이를 추인해야 한다는 이유가 더 크다. 이를 국민투표에 부칠 경우 대부분의 회원국 정부가 사실상 위기를 맞게 된다. 긴축 등 재정위기 해결 방안을 국민이 직접 좌우할 수 있는 개별 정부가 아닌 EU에 맡기려는 국민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는 유로존(EU 회원국 중 유로화를 쓰는 국가들)이 언젠가는 정부 간 협정을 통해 개별 정부의 권한을 상당히 보장하는 일종의 연방주의로 가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이렇게 할 경우 정치적 통합의 강도가 느슨해지고 개별 정부가 직접 나서는 일이 더욱 잦아질 것이다. 과거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 재임 당시부터 EU 지도국은 EU 기구에 일을 위임하지 않고 직접 나섰다. 이처럼 회원국 정부가 직접 나서게 될 경우 EU의 별도 행정·입법 조직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진다. 유럽의회는 재정적인 주권이 없기 때문에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EU가 사실상의 연방으로 가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 발전을 환영하고 있다.

 이처럼 위기는 유럽에 엄청난 변화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위기는 앞으로 몇 년에 걸쳐 유럽의 은행연합·재정연합·정치연합 등 새로운 어젠다 설정을 주도할 것이다. 위기 국가들의 경제성장 전략도 세워야 한다. 유럽인들이 만일 위기가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이 기회를 잡기 위해 보다 대담하고 단호하게 행동한다면 긍정적인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EU의 가치다. ⓒProject Syndicate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