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어서 나눠주는 건 경제정책 아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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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호 31면

“앞으로 경제 살리기를 하려면 대통령부터 ‘환율에 대한 낡은 시각’을 바꾸지 않고서는 요원할 겁니다.”

김시래의 세상탐사

한국은행의 한 인사가 최근 사석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다. 그간 한국 경제가 성장한 것은 기업들이 수출을 많이 해서 파이를 키웠기 때문이다. 수출 기업이 크면 국내에서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내수가 살아나 전 국민에게 낙수효과 같은 분배가 이뤄졌다. 이렇다 보니 정부와 국민 머릿속에는 수출에 유리한 원화가치 하락이 선(善)이라는 인식이 뿌리내렸다. 반대로 수입에 유리한 원화가치 상승은 악(惡)으로 치부했다. 원화가치가 상승할 땐 해외시장에서 일본과 경쟁하기도 힘들고 팔아도 남는 게 없다며 기업들이 아우성을 쳤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현대그룹에서 수출을 강조하던 최고경영자(CEO) 출신이다 보니 그런 환율 인식이 강하다고 한다. 현 정부 들어 원화가치 상승을 직·간접적으로 막아 삼성전자·현대자동차가 수출을 통해 많은 이익을 내도록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국내 산업구조의 변화로 예전같이 수출을 하면 일자리가 늘어나고, 내수가 살아나는 연결고리는 사실상 거의 끊겼다. 오히려 승자독식 현상으로 수출기업-내수기업 간, 대기업-중소기업 간, 제조업-서비스업 간 양극화의 부작용만 심화됐다.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국가신용등급이 상향되고 상대적으로 경제를 잘 운영해 왔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가 칭찬은커녕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환율’의 선과 악이 뒤바뀐 경제구조를 너무 가볍게 봤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 경제의 문제는 양극화 해소뿐만 아니라 ‘내수 살리기’ ‘일자리 만들기’가 시급하다. 이런 문제들을 푸는 데는 환율만 적정 수준으로 유지해도 상당한 효과가 있다는 게 경제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예컨대 원화가치가 적정하게 상승하면 석유·원자재 도입가격이 떨어져 전 국민에게 돈을 나눠 주는 효과가 있다. 좀 거친 논리로 말하면 원화가치가 오를 땐 내수기업과 중소기업, 서민이 골고루 혜택을 보지만, 거꾸로일 땐 수출기업과 대기업, 가진 자만 혜택을 보는 경제구조가 됐다.

이렇게 경제 살리기를 위해서는 다양한 정책조합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도 12월 대선을 향해 뛰는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의 경제 관련 공약과 정책을 뜯어보면 하나같이 ‘의적(義賊) 방식’뿐이다. 세 후보 모두 경제민주화라는 기치 아래 대기업들을 압박해 전리품을 나눠 주겠다는 거고, 가진 자로부터 세금을 더 거둬 나눠 주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수십 년 동안 우리 국민이 수출·성장에 올인한 성과가 대기업에 쏠렸으니 이제는 그걸 뺏어서 공평하게 나눠 갖자는 ‘집단의식’을 깔고 있다.

실제로 안철수 측은 ‘조정래식 경제인식’을 토대로 한다. 그의 후원회장인 조정래의 소설 『허수아비춤』에서는 “…소비자로서 줄기차게 기업들을 키워온 우리 모두에게 그 혜택이 고루 퍼지고, 또한 튼튼한 복지사회가 구축되어 우리나라가 진정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경제민주화”라는 대목이 있다. 안철수 측은 경제민주화의 첫째 과제로 ‘대통령 직속 재벌개혁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다.

박근혜 측은 보수 가치와 어울리지 않는 경제민주화를 앞세워 대기업 손보기를 예고한다. 이에 반대하는 이한구 원내대표를 윽박질러 목소리도 못 내게 하고 있다. 심지어 당 내부에서는 가진 자들로부터 돈을 뺏어 나눠 주자는 식의 부유세까지 거론하고 있다.

문재인 측은 ‘재벌개혁에 두 번 실패는 없다’고 벼르면서 순환출자 전면 금지 등 강도 높은 정책을 들고 나왔다. 주주대표소송제,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 자칫 대기업 해체도 불사할 듯한 자세다.

두 달가량 남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세 후보들로선 표심을 사로잡는 게 급할 것이다. 표가 된다면 홍길동이 아니라 히틀러 정책이라도 차용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것이다. 하지만 집권 뒤까지 생각한다면 그런 식의 선동주의와 포퓰리즘 정책을 쓸 수 없다는 현실을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분명한 것은 시장경제가 근간인 나라에서 분배 문제를 이른바 ‘단칼 정책’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구한 흔적도 없이 소설에나 나올 법한 홍길동식 경제정책을 쏟아내는 대선 후보들을 보면 국민은 허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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