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Global Biz] 성장 엔진 식은 인도 경제 현장을 가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인도 알라하바드시의 지역 노조원들이 인도 전통 빵을 들고 정부의 경제개혁 조치에 반발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인도 정부는 수퍼마켓 등 소매업에 대해 외국인 직접투자를 허용하는 조치를 지난 9월 발표했다. [알라하바드(우타그프라데시주) AP=연합뉴스]

인도 수도 델리에서 신비의 궁전 타지마할로 가는 190㎞의 여정은 이 나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압축해 보여주는 듯하다. 델리에서 타지마할의 도시 아그라를 잇는 165㎞ 고속도로는 이제껏 인도가 이룬 발전상을 상징한다. 지난 8월 완공된 인도 최초의 이 자동차 전용도로 덕분에 델리에서 타지마할까지가 5시간에서 2시간 반으로 크게 단축됐다. 왕복 6차로로 곧게 뻗은 이 도로 위로 세계 각국 브랜드의 승용차와 짐을 가득 실은 화물차들이 질주한다. 델리 외곽의 도로변으로는 고층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치솟고 있다. 대형 아파트 한 채 값은 1억 루피(20억원)를 훌쩍 넘을 정도다. 도로변의 대형 광고 입간판들에는 화려하게 치장한 남녀 모델들이 온갖 상품의 소비를 유혹한다.

 하지만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아그라로 들어서면 한순간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좁디좁은 길은 먼지가 자욱한 가운데 여기저기 파여 구정물이 튀기 일쑤다. 그 위로 승용차와 트럭, 3륜 택시 릭샤,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뒤섞여 끊임없이 경적을 울려댄다. 그 사이를 가로질러 우마차와 사람, 개와 소들이 지나간다. 차선도 신호등도 무시된다. 도로변의 간이식당과 노점은 음식을 사먹는 사람들로 왁자지껄하고, 불과 몇 걸음 옆 쓰레기가 뒹구는 담장에는 태연히 노상방뇨를 하는 이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이처럼 어수선하고 낙후한 장면은 수도 델리와 인도의 분당으로 불리는 신도시 구르가온, 남부의 항구도시 첸나이 등 어느 곳에서도 목격된다.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고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40~50년 전의 한국을 보는 듯하다.

 그렇게 도착한 타지마할은 역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17세기 한때 세계 총생산의 4분의 1을 점했다는 무굴제국의 영화를 실감할 수 있다. 불가사의라 할 만큼 완벽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남긴 역사는 인도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인도가 경제 대국으로 거듭나기까지는 가야 할 길이 너무 멀어 보였다. 지금 인도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아그라의 꽉 막힌 길 위에 정체해 있는 형국이다.

 인도가 기로에 서 있다. 글로벌 경제위기의 한파와 정부의 무기력한 대응으로 경제의 성장 엔진이 빠르게 식고 있다. 극심한 빈부격차와 정치인·관료들의 부패는 경제의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있다. 정부가 뒤늦게 경제개혁의 시동을 걸었지만 기득권층과 이해당사자들의 거센 반발로 헛바퀴만 돌리고 있는 실정이다. 마힌드라 그룹의 아난드 마힌드라 회장은 “인도는 지금 경제와 정치 모두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내가 성년이 된 뒤로 올해가 최악이다”라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인도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지난해 8.5%에서 올 2분기 중 5.5%로 뚝 떨어졌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앞으로 더 나빠져 올해 전체로 4.9%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지난 10년래 최저로, 매년 1300만 명씩 늘어나는 신규 노동인력을 흡수하기엔 턱없이 낮은 성장세다. 인도의 실업률은 현재 9.8%로 두 자릿수 문턱에 있다.

 12억 인구 인도의 올해 1인당 GDP는 1500달러 선에 도달한다. 지난 20년간 고속성장을 해왔지만, 아직 중국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인도 정부는 고용 안정을 도모할 적정 성장률을 8%대로 보고 있다.

 인도 정부는 글로벌 경제위기라는 어쩔 수 없는 외풍을 탓한다. 팔라니아판 치담바람 인도 재무장관은 “경제가 유럽 경제위기의 여파로 크게 흔들리고 있다”며 “수출과 외자 유치가 예전 같지 않다”고 말했다. 침체를 몰랐던 정보기술(IT) 서비스 수출까지 타격을 받다 보니 성장률이 떨어지고 경상수지 적자도 쌓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인도 정부와 정치권의 위기 대응 능력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인도 정부는 경제가 가라앉자 소모적인 보조금과 복지 카드로 민심을 달래기에 바빴다. 인도는 빈민층에 연 100일간의 공공취로 일자리를 주고 밀가루와 설탕 등 기초 식량을 무료로 제공한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전 국민을 대상으로 경유와 전기, 비료 등에 막대한 국가 보조금을 투입한다. 경유 연료에 대한 보조금만 올해 2조 루피(40조원)에 달한다.

 그러다 보니 국가 재정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 GDP 대비 재정적자 규모가 올해 9%대로 치솟았다. 국가부채는 GDP의 90%를 넘었다. S&P 등 신용평가회사들은 인도의 국가신용등급을 투기등급 직전인 BBB-까지 떨어뜨렸다. 이는 중국·브라질·러시아 등 다른 브릭스 국가들에 견줘 가장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인도는 잘나가던 시절의 자만심에 아직 푹 빠져 있는 것 같다. 외국인 직접투자(FDI)를 가로막는 각종 규제가 여전히 판을 친다. 게다가 공무원들은 재량권 남용과 뇌물 수수 관행, 민원이 걸리면 아무 일도 진척시키지 않는 복지부동 등에 빠져 있다. 외국인은 물론 내국인의 투자의욕까지 꺾는 고질적 병패다.

 한국의 포스코가 대표적 사례다. 포스코는 2005년 인도 동부 오리샤 주와 제철소 건설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무려 120억 달러를 투자해 광양제철소급의 공장을 지어 2만 명의 직·간접 고용 효과를 가져오는 대형 프로젝트다. 하지만 환경 파괴를 주장하는 일부 지역 주민과 시민단체 등의 반발에 부닥쳐 7년째 땅도 파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알아서 지역민들을 설득하라고 수수방관하고 있다. 윤용원 포스코인디아 사장은 “최근에야 인도 정부가 조금씩 움직여 주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경제위기가 가져온 효과라면 효과다.

 인도 정부와 정치권의 부패와 무사안일은 좀처럼 치유되지 않고 있다. 유권자 7억 명으로 세계 최대 민주주의 국가를 자처하는 나라의 역설적 모습이다. 독재자가 없고 국민에 대한 탄압도 없지만, 부패는 아프리카나 남미의 독재국가를 뺨친다. 델리에서 사업을 하는 한 교포는 “여전히 투자액의 6~9%를 뇌물로 줘야 가능한 비즈니스가 많다”고 귀띔했다.

 부패 문제에 대해선 인도 기업인들도 혀를 내두른다. 인도 최대 재벌인 타타그룹의 IT컨설팅 회사인 TCS의 시다르탄 해외영업총괄본부장은 ‘인도의 부패는 언제쯤 사라질 것 같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 세대엔 어렵다고 본다”고 냉소적으로 답했다.

 물론 희망도 엿보인다. 만모한 싱 총리가 지난달 경제개혁의 칼을 빼들었다. 경유 1L당 17루피씩 지급하던 보조금을 5루피 줄이기로 결정했다. 싱 총리는 또 할인마트와 백화점 등 소매업에 FDI를 51%까지 허용하고, 항공과 전력거래·방송 등 부문에 FDI를 대폭 확대하는 조치를 취했다. 보험과 연금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도 49%까지 허용했다.

 일련의 개혁조치가 발표된 이후 인도 전역은 반대 시위로 들끓고 있다. 일부 정치 세력은 싱 총리에게 연립정부에서 탈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지방 정부들도 반발하고 있다. 인도는 철저한 지방 분권 통치의 나라다. 지방 정부는 국가 예산의 절반을 집행하면서 주요 산업정책까지 좌우한다. 지방 정부가 따라주지 않으면 개혁은 공염불이다.

 싱 총리는 “후퇴는 없다”고 맞서고 있다. 그는 “돈이 나무에서 열리냐”며 국민들의 고통분담을 호소했다. 인도의 언론과 지식인들은 현대자동차 첸나이 공장 등의 FDI 성공사례를 예로 들며 개혁·개방과 규제완화를 응원하고 있다. 일부 지방 정부도 개혁에 호응했다.

 그러나 갈 길은 아직 너무 멀다. 인도 히마찰프라데시 주 정부의 과학기술국장인 나진 난다는 “경제를 되돌리기엔 개혁이 늦었다. 싱 총리가 너무 시간을 끌었다”고 비판했다. 15년째 인도를 지켜본 현대차 인도법인의 류병완 상무는 “결국 민도가 올라가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젊은이들의 생각이 기성세대와 다르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소비문화를 선도하는 인도의 젊은이들은 개혁 정책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

 인도는 국민의 평균연령이 25세밖에 안 되는 젊은 나라다. 2020년대 중반이면 인구가 중국을 제친다. 영어를 쓰고 신기술에 정통한 고급 인력이 넘친다. 핵무기와 핵발전소를 만들고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기술을 보유 중이다. 부패 척결을 주장하는 시민운동도 태동하고 있다. 민주주의 시스템은 국민들의 의식만 깨이면 어떤 변화도 이뤄낼 수 있는 토양이다. 늦더라도 결국은 시간 문제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모건스탠리의 신흥시장 총괄사장인 루치르 샤르마는 최근 쓴 『브레이크아웃 네이션(도약하는 나라들)』에서 “인도가 10년 내 고성장 궤도로 복귀할 확률은 반반”이라고 했다. 재도약의 열쇠는 인도 국민들이 쥐고 있는 셈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