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그 길 속 그 이야기<31> 광주 무등산 무돌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6면

남도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산, 무등산에는 무돌길과 옛길 등 다양한 탐방로가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주상절리대가 있는 정상부위는 군부대 때문에 올라갈 수 없다. 그래서 광주광역시는 가끔 개방 행사를 열고 있다. 지난 7일에 이어 11월 17일에도 다시 한번 문을 열 예정이다.

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에게 산은 삶의 터전이다. 하지만 다른 마을과의 왕래를 어렵게 만든 것 또한 산이다. 먹고살기 위해 할아버지·할머니들은 산에서 난 것들을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재를 넘고 산을 넘어야 했다. 남도에 자리잡은 무등산(1187m) 자락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백 년 동안 이어온 조상들의 이 고단한 발자국 하나하나가 모여 무등산 자락에 올망졸망 모여 있는 마을들을 잇는 오솔길이 됐다.
이 길이 지난해 말 다시 태어난 무등산 무돌길이다. 무돌길은 무등산의 옛 이름인 무돌뫼에서 따왔다. ‘무등산 자락의 마을과 마을, 재를 넘어 한 바퀴 돌아보는 옛 길’이라는 의미도 담았다. 무돌길은 이렇듯 가난한 민초들의 삶의 길이었지만 때로는 나라를 구하는 길이 됐고 때로는 시가 흐르는 길이기도 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3월 무돌길을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1 소쇄원은 조선시대 최고의 정원으로 꼽힌다. 무돌길 인근에 있다. 2 담양에 있는 명옥헌 원림의 연못 정원. 3 김덕령 장군이 어릴적 공부도 하고 뛰어놀기도 한 환벽당으로 가는 돌담길에 울긋불긋 가을이 내려앉았다. 4 무돌길을 찾은 걷기 여행족이 각화마을입구에서 시를 감상하고 있다.

굴곡진 역사의 아픔을 지켜본 무등산

무등산은 화려하지도 않고 깊지도 않은, 그런 넉넉한 산이다. 무등(無等)은 이름 그대로 등급을 나누지 않는 모두가 평등한 산이다. 남도 사람들에게 무등산은 어머니 같은 산이다. 잘난 자식이나 못난 자식이나 똑같이 품어주는 그런 어머니 말이다. 굴곡진 역사와 아픔을 모두 감내해야만 했기에 남도 사람들에게 무등산은 더욱 더 어머니 같은 느낌이다.

무등산은 지조 있는 산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인정해 달라며 전국의 명산대찰을 돌아다니며 빌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등산과 지리산만은 그의 소원을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안내를 맡은 원근수(59)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이다.

이런 무등산의 기개는 남도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옮아갔다. 불의를 보면 분연히 일어섰다. 남도 사람들은 바로 이 무등산의 정기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조선시대의 의병활동, 일제 강점기 항일 학생운동의 시발점이 됐던 1929년 광주학생운동, 온몸으로 군부에 저항했던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까지….

재미난 이야기도 있다. 1187m밖에 되지 않은 그리 높지 않은 무등산이지만 정상 부위를 보기는 쉽지 않다. 일 년 중 53일 정도만 얼굴을 내민다고 한다. 원근수 해설사는 “조상들이 덕을 많이 베풀었거나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만이 산꼭대기를 볼 수 있다”고 전했다.

무등산 정상 부근에는 서석대·입석대 등 주상절리대가 있다. 육당 최남선은 “마치 해금강을 산 위로 옮겨놓은 것 같다”고 했다. 산 정상 부위에 주상절리대가 있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다. 중생대 백악기 화산활동 때 용암이 냉각 수축하면서 만들어진 것들로 나이가 무려 9000만 년쯤 된다고 한다. 20만 년 정도인 제주도나 경기도 한탄강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됐다. 광주광역시는 장차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를 추진할 예정이다.

무돌길 들머리인 각화마을은 시화마을로 유명한데 문패도 집집마다 특색있게 만들었다.

무돌길에 숨어 있는 김덕령 장군 이야기

무돌길에서 ‘만나는’ 인물이 있다. 김덕령(1568~1596) 장군이다. 광주 사람들에게는 이순신 장군만큼이나 친숙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5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남 지방으로 출정해 곽재우와 함께 왜군을 격퇴한 장군이다. 최근 영화로 만들어진 역사소설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도 언급된다. 어린 광해군이 전주로 내려갔을 때 장군의 무술 시범을 본 후 ‘익호장군’이라는 군호를 내렸다고 한다. 픽션이 아니라 실화다.

무돌길 3구간 배재마을 인근에는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사당, 충장사(忠壯社)가 있다. 조선시대 세워진 게 아니라 박정희 정권 때 만들어졌다.

금곡마을도 김덕령 장군과 관련이 있다. 무돌길 3구간에서 4구간 사이에 있는 금곡(金谷)마을의 옛 이름은 쇳골이다. 골짜기에 쇳물이 흘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군은 무등산 장불재에서 난 철을 갖고 와서 쇳골 위에서 칼 등 각종 무기류를 만들었다고 한다.

장군의 생가터는 무돌길 4구간 인근에 있다. 원래는 석저촌이라고 불렸지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다했던 장군의 정신을 기리라’는 정조의 지시로 충효리(현 충효동)로 바뀌었다. 생가 터 근처에는 환벽당이라는 정자가 있다. 어릴 적 장군이 공부도 하고 뛰어놀기도 하던 곳이다. 인근의 취가정은 그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

무등산에는 장군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 여럿 있다. 장군은 무등산 정상 부근의 지왕봉 인근 주상절리 바위대에서 뜀을 뛰며 무술을 익혔다고 한다. 그래서 그 바위를 ‘뜀바위’ ‘담력바위’라고 부른다. 여기에도 재미난 일화가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 때 장군의 이야기를 들은 일본 순사가 자신도 따라 해보겠다며 바위와 바위를 건너뛰다가 그만 떨어져 죽었다는 얘기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만큼 장군의 담력과 도술이 뛰어났음을 강조하는 일화다.

개조심 경고판도 직접 그려서인지 정겹게 느껴진다.

시와 그림 이야기가 있는 1~5코스

무돌길 전 구간 중 1~5코스까지 16㎞를 걸었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산길이거나 포장된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어서 큰 재미는 없다. 그러나 길에서 약간만 벗어나면 이야기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 또한 무돌길이다.

들머리인 각화마을은 온 동네가 시와 그림으로 넘쳐나 시화마을이라고 불린다. 마을 전체는 큼지막한 갤러리며 골목골목이 미술관이다. 창틀에서는 개가 머리를 내밀고 인사를 나누는 것 같다. 담벼락과 담벼락을 이어서 만든 기차 벽화는 기적을 울리며 금방이라도 출발할 듯하다. 탈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어깨가 들썩일 것만 같다.

담벼락에는 고은·푸시킨 등 익숙한 시도 많고 초등학생들의 자작시도 있다. 그런데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문패다. ‘밝음이 되는 촛불의 집’ ‘사랑이 가득한 집’ ‘행복이 넘쳐나는 집’ 등 자기 집을 자랑하는 문구들이 적혀 있다.

각화마을을 지나면 다음부터는 발길을 잡는 볼거리가 거의 없다. 각화저수지도, 국악전수관도, 분청사기박물관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런 길을 세 시간 이상 걸어야 한다. 원근수 해설사는 “무돌길은 대부분 이런 길이다. 전체적으로는 다소 심심한 느낌의 길이다”라고 일러준다. 길이 지루하다 보니 발걸음은 더 무거워졌다.

그래서 4구간을 걷다 살짝 벗어났다. 소쇄원 가는 길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정원으로 꼽히는 소쇄원,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이 수많은 가사(歌辭)를 지었다는 식영정과 어릴 적 뛰놀던 환벽당 등 정자들이 수두룩했다. 조선시대 가사문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한국가사문학관도 있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광주호와 호수 생태원도 있다. 무돌길보다 훨씬 이야기와 볼거리가 많다. 근데 무등산 옛길 3코스로 먼저 지정된 탓에 무돌길 코스에는 빠졌다. ‘이 길이 포함됐으면 발걸음이 한결 더 가벼울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이석희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 길 정보

무돌길은 광주광역시 동구·북구, 전남 담양군과 화순군에 걸쳐 있다. 15개 구간으로 전체 길이만도 51.8㎞에 이른다. 쉬지 않고 걸어도 스무 시간은 걸려 완주하고 싶은 사람들은 대개 1박 2일 일정으로 무돌길을 찾는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는 이정표를 잘 세워놓았지만 산길, 특히 갈래길에서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나뭇가지에 무돌길이라고 적힌 노란 리본이 달려 있는데 쉬이 찾을 수 없는 것이 단점이다.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062-528-1187)에 연락하면 해설사의 구수한 남도 사투리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단 경
비는 개인 부담이다. 2시간 5만원. 길을 걷다 중간에 돌아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무등산 순환버스가 다닌다. 다음달 18일까지 예정돼 있는데 매주 토·일요일 오전 9시 광주역에서 출발한다. 하루 여섯 차례, 요금은 1인당 2000원이다. 062-233-9370.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