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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타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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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주철환
JTBC 대PD

드라마의 성패는 종방연에서 드러난다. 현장에선 ‘쫑파티’라고도 부르는 그곳 풍경은 대체로 두 가지. “작품은 좋았는데 운이 안 따라주네요.” 시청률이 낮았다는 얘기다. 대화는 적고 술잔만 차분히 오간다. 한숨 소리도 간혹 들린다. 히트한 쪽은 정반대다. 웃음소리가 낭자하다. 주연배우 주변은 사진촬영으로 분주하다. 여기저기서 덕담이 오간다. “속편 준비하셔야죠.”

 실패의 원인은 보고서 한 장으로 모자라지만 성공의 요인은 손가락 몇 개로 충분하다. 똑똑한 기획(예지력), 시간에 맞춰 잘 쓰는 작가(상상력, 체력), 적역을 맡은 배우들(연기력). 그리고 다음 회를 기다리게 만드는 연출. 그 조합이 쉽지 않다.

 드라마 ‘골든타임’이 끝나고 권석장PD와 통화했다. 그는 20년 전 ‘일밤’의 조연출이었다. 시작부터 달랐다. ‘몰래카메라’가 문을 닫고 ‘시네마천국’으로 명맥을 이어갈 때 그는 고기가 물 만난 것처럼 날쌔고 날렵했다. 월요일 아침이면 드라마 선배들이 ‘어제 나간 거 누가 찍었느냐’고 물어보는 일이 잦았다. 대견해서 용돈을 쥐여주면 ‘푸른 것은 나를 기쁘게 한다’며 해맑게 웃던 친구다.

 승자의 무용담이 궁금했다. “완전히 골든타임이네.” “운이 좋았죠.” (행운은 실력자를 알아본다.) “제목을 잘 지은 것 같아.” “‘나는 의사다’로 할까 하다가.” (예능감이 살아 있다.) “염두에 둔 모델이 있었나?” “현실에 없지만 꼭 있어야 할 것 같은 의사, 찾아보면 어딘가 있을 것 같은 의사죠.” (그것이 드라마다.) “성공 요인이 뭘까.” (잠시 머리를 굴리더니) “진정성?”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환자를 대하는 심리, 태도의 진정성이 잘 전달된 것 같아요.” (진정성의 핵은 진실함과 간절함이다. 그것은 송신과 수신의 주파수가 맞을 때 완성된다.) “캐스팅이 화제던데. 최인혁 교수로 나온 이성민은 어떻게 발탁했어?” “예전에 ‘파스타’ 연출할 때 가능성을 봤죠. (그렇다. 연기는 기능성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변방에 우짖는 새의 느낌이 난달까.” (맞다. 변방에 있대서가 아니라 변방에서 우짖었기 때문이다.)

 캐스팅이란 결국 사람과 시간을 쓰는 일이다. 하지만 좋은 결과를 위해선 써야 할 것들의 순서가 있다. 돈부터 쓰거나 칼부터 쓰면 안 된다. 머리를 쓰고 마음을 써야 한다. 손도 쓰고 애도 쓰고 신경도 써야 한다.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는 것도 방법이다. 쓰지 말아야 할 것들의 목록도 있다. 인상 쓰지 마라. 억지 쓰지 마라. 악쓰지 마라.

 화제의 드라마는 한 시간 수업교재로도 손색이 없다. 중증 외상환자에게 절체절명의 시간이 골든타임이란 건 지식의 범주이지만 그 순간 누구를 만나는지에 따라 생명이 왔다 갔다 한다는 건 지혜의 영역이다. 골든타임이 일깨워준 건 두 가지다. 첫째 생명의 존엄이라는 가치는 만고불변이다. 둘째 행운, 혹은 불행이란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만나는 데서 시작된다.

 히트한 드라마는 배우의 스토리도 덤으로 끼워 판다. ‘힐링캠프’에 초대받은 배우 이성민의 추억과 전망도 찡하다. 헤아려보면 그가 감독을 잘 만난 것도 행운이지만 이성민을 잘 만난 감독 역시 행운아다. 드라마의 탄생 과정은 결혼과 흡사하다. 만나고 만지고 만드는 것이다. 여기엔 호기심, 안목, 기술, 정성, 그리고 사랑이 필요하다. 둘은 서로에게 감사를 전하는 중이다. 그걸 지켜보는 시청자들은 따로 사전을 찾지 않아도 배우게 된다. 그게 진정성이다.

 배우 이성민 앞엔 지금 기자들이 줄 서 있다. 질문은 예상대로다. “당신 인생의 골든타임은 언제냐?” ‘바로 지금’이라는 예상 답안은 빗나갔다. “내 인생의 골든타임은 20대였죠.” 그러면서 즐겁게 묘사한다. “대학로에서 연극 전단 붙이며 단속반에게 쫓기던 그 시절이 가장 전성기였습니다.”

 골든타임은 위기의 순간이자 기회의 시간이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 건 ‘느려서’가 아니라 ‘꾸준해서’였다. 그리고 운이 따랐다. 모든 토끼가 그런 건 아닐 텐데 하필 자만에 빠진 토끼를 만난 게 행운이었다. 교사들은 이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주철환 JTBC 대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