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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사형제로는 우리 아이 못 지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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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토마스 코즐로프스키
주한 유럽연합(EU) 대표부 대사

오늘(10월 10일)은 세계 사형제 반대의 날이다. 잘 알려진 대로 유럽연합(EU)의 모든 회원국은 사형제를 폐지했다. 사형제를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비인간적 제도로 여기기 때문이다. 형벌의 목적이 죄인에게 알맞은 형벌을 줘서 교화시키는 것인데 사형제로는 결코 교화시킬 수 없다.

 최근 한국에서는 끔찍한 살인사건과 성범죄가 잇따라 일어났다. 엄청난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는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이런 끔찍한 범죄에 대한 분노와 재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최근 한국에서는 사형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부 피해자 가족이 범인을 사형으로 다스리는 것을 정의의 실현으로 여길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사형제가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범죄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사형제로는 결코 강력범죄를 근절할 수 없다. 사형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범인이 범행 직전에 자신이 검거될 경우 어떤 처벌을 받을지를 고려해 극단적인 행동을 자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살인자나 흉악범죄자의 상당수는 충동적이거나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다. 심지어 일부는 본인이 검거돼 처벌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피해자의 증언을 막기 위해 범인이 더욱 흉악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많은 연구자의 노력에도 사형제가 살인을 비롯한 흉악범죄의 발생률을 의미 있게 떨어뜨린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사형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도했던 범죄를 포기한 경우는 드물다. 사형제가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명확한 근거가 없다면 국가가 이를 시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국가가 한 생명을 앗아 간다는 것은 스스로 인간 생명 존엄성 수호를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사형제는 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 이뿐만 아니라 사형제는 모든 잘못을 범죄자에게 돌려 문제의 범죄자를 생산한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은폐하는 역효과도 있다.

 이 때문에 사회는 사형제를 폐지하거나 보류하는 대신 국민을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보다 효과적인 방안을 찾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9월 초 대국민성명에서 경찰 증원, 아동 성범죄를 유발하는 온라인 음란 동영상 규제 강화, 재범 위험이 큰 성범죄자 관리 강화, 사회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적 보호망 확대, 아동들이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탁아시설 강화 등 정부의 범죄 예방대책을 발표했다.

 발표 하루 뒤 한국 정부는 권재진 법무부 장관 명의로 올 12월 출범 예정인 ‘인터넷 아동 성범죄 해결을 위한 국제 연대’ 가입의사를 확인하는 서신을 EU에 전달했다. EU는 한국 정부와 긴밀한 협력을 통해 인터넷 아동 성범죄율 감소 및 방지를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이다.

 지난여름 이후 한국 정부가 보여 준 다양한 범죄 대응방안은 신중하고 현명한 것으로 평가된다. EU는 한국의 사형집행 유보 입장 고수를 지지한다. 사형집행 유보는 국제사회에서 긍정적인 한국의 이미지 구축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국은 사형제를 폐지했거나 집행유보 중인 세계 141개국 중 일원이다. 한국은 국제적인 큰 흐름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한 발 더 나아가 사형제 폐지국가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국의 사형제 폐지는 동북아시아 주변국에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아울러 인권 수호자로서 한국의 위상을 굳건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가족과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방안을 강구하고 시행하는 데 사회의 힘을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토마스 코즐로프스키 주한 유럽연합(EU) 대표부 대사